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문필기 할머님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7
故 이양근 할머님
2,010年 12月 11日, 전북 익산에서 거주하시던 故 이양근 할머님께서도 운명하셨었다.
1,923年, 전북 익산에서 출생하신 故 이양근 할머님은 1,942年 방직공장
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꾀여 싱가폴에서 해방될 때까지 지속적
으로 일본군의 ‘ 성노예 ’ 로 힘겨운 날들을 보내셨었다.
故 이양근 할머님은, 해방 후 귀항하셨으나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셨었다고 한다.
故 이양근 할머님은, 노인성 질환으로 힘겨워 하시다가, 갑작스런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하루를 넘기시지 못하고 그만 눈을 감으셨었다고 한다.
故 유희남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유희남 할머님이, 향년 90세로 2,016年
7月 10日 오전 8시 24분 국립 중앙 의료원에서 영면하셨었다.
故 유희남 할머님은, 1,928年 충남 아산군 선장면에서 출생하셨었다.
故 유희남 할머님은, 15살에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려고 60리가 넘
는 곳으로 도망 다니다가 붙잡혀 1,943年에 시모노세키에서
1년 동안 일본군의 ‘ 성노예 ’ 로 피해를 당했었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싱가폴로 이동 중, 원자폭탄이 떨어져 돌아오다가
오사카 주민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귀환하게 됐었다.
한국에 도착 후에도 계속 도망을 다니다가, 절에 들어가 생활을 하기도 했
었고 · 해방 후 보따리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지난
2,012年 6月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을 해 왔었다.
또한 故 유희남 할머님은, 폐암으로 투병 중에도 반인권적이고 · 반역사적인 책으
로 할머님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박유하 교수 재판에도 참여하셨었다.
그리고 故 유희남 할머님은, “ 다시는, 이러한 아픈 역사가 반복되서는 안된다 ” 라
고 말씀하시면서 “ 일본의 만행은, 전 세계인이 알아야 한다. 그래서 피해역
사를 유네스코에 반드시 등록해야 한다 ” 라고도 강조하셨었다.
그리고 또 유희남 할머님은, 늘 후유장애로 인한 불면증과 심장질환 · 폐암으로 고통을 받으셨지
만, 일본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 피해자 명예 회복을 위해 애쓰시다 훌훌 떠나셨었다.
그러나 故 유희남 할머님의 영결식은, 유가족들의 요청으로 언론
에 공개되지 않은 채 조용히 진행됐었다고 한다.
故 김경순 할머님
2,016年 2月 20日,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에 따르면 서울 강서구에 거주
하시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김경순 할머님이 향년
90세로 오후 12시쯤 지병으로 눈을 감으셨다고 발표했었다.
故 김경순 할머님은, 일제 강점기 일본 히로시마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으며, 이때 병을 얻어 한국으로 돌아왔었다.
故 김경순 할머님은, 1,992年 정대협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신고하고 · 활동해 왔었다.
또 故 김 할머님은, 1,993年 7月 말 일본 정부 조사단에 직접 피해 사실을 증언했었다.
故 김경순 할머님 등 16명이 참여한 이 증언은, 같은 해 8월 4일
일본이 ‘ 고노담화 ’ 를 발표하는 근거가 됐었다.
고노담화에는,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의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하는 내용이 담겼었다.
그리고 故 김경순 할머님은, 7月 다른 위안부 피해자인 故 유희남 할머님과
함께 아키히토 일왕과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 주요 인사와 미
쓰비시 · 도요타 · 산케이 신문 등 20여개 기업을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와 명예훼손의 민사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었다.
그러나 故 김경순 할머님은, 그간 지병을 앓으며 입원 · 수술 · 퇴원을 반복하셨었다 한다.
그리고 故 김경순 할머님은, 눈을 감기 며칠 전부터 다른 위안부 할머님들과 정대협
관계자들에게 “ 보고 싶다 ” 라며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전해졌었다.
故 박위남 할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