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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6

타계한 위안부들

by tl3659\0\0 2017. 6. 28.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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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님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6

 

 

 

일본군 위안부?

 

당시 일본군의 만행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서도 잘 나타난다.

 일본은, 한국 · 대만 등지의 여성들을 데려가 산부인과와 같은 곳에서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수술을 시킨 다음, 군수품 마냥 성 노예로써 하루

 100정도의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것은 물론이

거니와 폭행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 임신한 위안부 여성을 일본군 두 명이 끌고 가더니,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끈으로 묶은

 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그 여성의 배에 칼을 꽃아, 아이가 죽은 채로 튀어나오

게 했다 ” 라는, 할머니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인들이 저지

만행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일본정부는, 공식적인 사과 한 마디 없었고 · 마지못해 일본

민간인들이 위안부들에게 위로금 형식으로 모금하여 보상금이라는 명목으

전달했을 뿐,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받지 못한 상태다.

 

 

 

황선순 할머니.  2013년 4월 5일 전남 화순군 능주면 자택에서.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황선순 할머님

 

2,015 1 26,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황선순 할머님은 향년 89세로 그만 작고하셨었다.

공교롭게도, 1年 전 故 황금자 할머님(당시 90세)이 돌아가셨던, 바로 그 날에.

 

황선순 할머님은, 지난 1,926年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셨었다.

황선순 할머님은, 부모님을 일찍 여읜 후 남동생과 함께 살며 17살 때 고모집

으로 밥을 얻어 먹으러 가던 중, 부산에 있는 고무공장에 취직시켜 주겠

다는 이웃의 말에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가게 되셨다고 한다.

 

故 황선순 할머님은, 부산과 일본을 거쳐 남태평양 작은 섬 나우루에 있는 위안소

에 동원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3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했었다.

 

어렵게 돌아온 고국, 그러나 할머님에게 남은 것은 가난 그리고 뇌

경색과 당뇨 등 셀 수 없이 많은 질병 뿐이었다.

지만 故 황선순 할머님은,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혼해 얻은 24녀를 꿋꿋하게 키웠었.

 

헌데 잊으래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故 황선순 할머님은 인터뷰 당시 치매 초기였음에도

위안부 시절 보았던 일본군의 배와 비행기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했었다고 한다.

 

황선순 할머님의 아들은 “ 우리 집, 찾아간다 ” 라며, 집 밖으로 도망을 가는 어

머님이 걱정돼, 24시간 내내 할머님의 곁을 지켜야만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故 황선순 할머님의 빈소는, 전남의 한 병원에 마련됐었으나 · 영결

식은 유가족의 뜻에 따라 비공개로 엄수됐었다고 한다.

 

맨마지막 컷은 사람들을 배웅하는 할머니의 미소였다. 몇번이나 인사를 하고도 발걸음을 떼지 못해 들락거리는 손님들에게 할머니는 편안히 돌아가라는 듯 따뜻한 얼굴로 배웅해주셨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2,01345, 전남 화순군 능주면 자택에서의 故 황선순 할머님

이정아 기자 · leej@hani.co.kr

 

 

박옥련 할머님

 

2,011 515, 경기도 광주 퇴촌면 나눔의 집에서 거주하시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박옥련

할머님도 향년 92세로 타계하셨었.

 

나눔의 집에 따르면, 故 박옥련 할머님이 호흡곤란 증세로

병원에 입원 후 타계하셨었다고 한다.

 

故 박옥련 할머님은, 1,919年 전북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에서 태어

23세인 1,941남태평양 최대 격전지인 파푸뉴기

섬 라바울에서 일본군의 ‘ 성노예 ’ 생활

1,944年 귀국해 해방 후 결혼하시어

슬하에 12녀를 두었었다.

 

그리고 故 박옥련 할머님은, 1,993年에 일본군 ‘ 위안부 ’ 피해자

대상결정 통지서를 받아 1,996부터 나눔의 집으로 거

처를 옮긴 뒤 2,000 1月부턴 매주 열리는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집회에 참석하셨었다.

 

또한 故 박옥련 할머님은, 국내 · 외의 증언회에 참석하시고, 일제강점하 강제

피해 진상 규명법 통과를 위한 활동, 2,0075月 미국 하원에 결

조속 통과를 위한 영상편지 발송에 참여하는 등 일본군의

강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당국의 정식

피해 보상을 위한 활동을 하셨었다.

 

나눔의 집을 찾은, 한나라당 김영선 대표 최고위원과 함께

과일을 드시던 故 박옥련 할머님의 생전 모습. 

  

  

박차순 할머님

 

2,017 118, 중국 호북성에서 거주하시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故 박차순 할머님도 향년 94세에 노환으로 작고하셨다고 한다.

 

故 박차순 할머니는, 1,923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었다고 한다.

이후 술통에서 술을 떠서 파는 점원 생활을 하시, 1,942 양말공장에 취직시켜 준다

말에 속아 중국 내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끌려가, 해방 전까지 후난(

)· 난징(南京) · 한커우(漢口) · 우창(武昌) 등의 위소에지속적

로 일본군인들을 상대로 ‘ 성노예 ’ 생활을 강요당했었다.

 

그러다 해방 이후엔, 일본군인들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한데 모으는

와중에 소홀한 감시를 틈타 도망쳐 살아남았었다.

 

하지만 故 박차순 할머님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 남았었다.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해서 故 박차순 할머님은, 감히 고향으로 돌아 올 생각도 못한 채 중국에 남다행히

한족농민 황씨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었지만, 위안소 때 성병 예방제로 정기적

으로 맞은 주사인 ‘ 606(실상은, 성병 치료제인 살바르산이라는 이 주사

수은치료와 함께 훗날 위안부들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 이란 주사의 후유증 탓에 자식이 없어, 입양

양녀를 키우며 계속 중국에서만 사셨었다고 한다.

 

정대협은, 중국 호북성으로 할머님을 찾아 뵈었을 때 할머님은 우리말을

 다 잊었지만, 고향을 여쭤보니 ‘ 전남 나주 ’ 라고 우리말로 답하

시곤 ‘ 아리랑 · 두만강 ’ 노래도 부르셨다 고 전했었다.

 

그러나 故 박차순 할머님은, 2,015年부턴 척추협착증 · 결장염 · 뇌경색 등으로 인해

강상태가 악화돼, 2,017 118() 오전 7 30분 경(중국

시각 기준)에 그만 운명을 달리하시고 말아셨었다고 한다.

 

정대협은 또 조선은, 괜찮냐? ” 라며, 고국 걱정을 하시던 할머님이

결국 건강 상태가 급속로 악화돼, 오늘 오전 눈을 감으셨다.

부디, 마음 편히 잠드시길 바란다 ” 라고 밝혔었다.

 

박차순 할머님의, 마지막 인터뷰 · 말씀

 

中 거주 위안부 피해자 박차순 할머니 별세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강덕경 할머님의 그림 - 눈내리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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