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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4

타계한 위안부들

by tl3659\0\0 2017. 6. 2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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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김순덕 할머님의 그림 - 만남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4

  

 

 

 

故 배춘희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배춘희 할머님은, 2,014 6 8

새벽 5시께 나눔의 집에서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나셨었다.

  

고향이 경북 성주인 배 할머님은, 19살 때부터 중국 만주에서 강제 위안부로

초를 겪곤, 광복 이후 중국과 일본 생활을 거쳐 1,981귀국해

1,997年부터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지내셨었.

  

배 할머님은,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3년 전부턴 ‘ 수요집회

참석하지 못하신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었.

 

배 할머님은, 평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작품도 남겨셨으며, 일본어 · 중국

등 어학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여셨것으로도 전해졌었.

 

특히, 2,012年 일본군의 ‘ 종군 강제 안부 피해자들 에게 지급되는 생활안정 지

원금을 아껴 한 불교대학에 장학금으로 3천만 원을 기부하기도 했었.

 

 

故 김순덕 할머님

 

그림을 통해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들의 피해 실상을, 전세계에 알렸었던 김순덕(83)

님이 2,004 6 30 오후 155분쯤 서울 아산병원에서 별세하셨었.

 

경기도 광주 ‘ 나눔의 집 ’ 에서 생활하셨던 김 할머님은, 이날 아침 갑자

뇌출혈로 쓰러진 뒤 끝내 의식을 되찾진 못하셨었다고 한다.

 

1,921경상남도 의령에서 23녀의 둘째딸로 태어난 김 할머님은, 17살 때 취

직을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일본 나가사키로 끌려간 뒤 3여年 동안 중국 상

하이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으셨었다.

 

1,94020세에, 한 일본 군인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뒤 50여 年이 지난 1,993

에야 겨우 일본군의 ‘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 로 등록하셨었다.

 

김 할머님은, 잔혹했던 일본군의 ‘ 종군 강제 위안부 생활 그림을 통해 표현하셨었다

일본군에 손목이 잡힌 채 위안부로 끌려가는, 한 처녀의 슬픔을 담은 ‘ 끌

려감 · 못다 핀 꽃 ’ 등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김 할머님은,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도 매주 참여하시어 일본 정부

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하셨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었다. 

  

 

달연 할머님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 종군 강제 위안부로 사셔야 했었던 심 할머님은,

한많은 생을 뒤로한 채 2,010 12月 간암으로 생을 마감하셨었다. 

 

13세였던 심달연 할머님은, 나물을 캐다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로 끌려가셨었다.

故 심 할머님은, 종군 위안소의 충격으로 정신착란 상태로 지

내다, 동생의 극진한 노력으로 차츰 회복됐었다.

그러나 2,010 12간암으로, 한많은 세상을 떠나셨었다.

 

 

공점엽 할머님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공점엽 할머님은 향년 96세 때인

 2,0165月 17오후 510분께 지병으로 별세하셨었다.

 

1,935年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셨던 故 공점엽 할머님은, 16살이

어린 나이에 비단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속아 일본군에

끌려가 24살이 되던 1,943무렵까지 일본군 위안

부로 모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했었다.

 

1,945年 해남으로 귀국해, 1,947年 결혼했었으나 결혼 8年만에

편이 숨지면서, 아들을 홀로 키우며 살아왔었다.

 

故 공점엽 할머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해

, 그 뇌졸중이 악화돼 그만 세상을 떠시고 말았었다.

 

한겨레

공점엽 할머님이, 아들과 함께 하셨던 생전 모습

 

故 공점엽 할머님, 95번째 생신잔치 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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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공점엽 할머님의, 꽃상여 나가던 날

 

 

이수단 할머님

 

국에서 생활해 온, 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이수단 할머님이

2,016517오후 3시께(현지시간) 헤이룽장(黑龍江) 둥닝

(東寧) 현의 한 양로원에서 향년 95세의 일기로 별세하셨었다.

 

1,921年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故 수단 할머님은, 일제강점기였던

19세 때 고향인 평양에서 ‘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공인

(工人)을 모집한다 ’ 는 광고를 보곤 자원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곳인 중국 흑룡강성으로 끌려간 故 이수단 할머님은,

군이 칼을 찬 모습을 보곤 무서워 도망치려 했었지만, 붙잡혀 고초를

당하고, 아성 위안소 등에서 ‘ 성노예 ’ 로 혹사당했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오고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고 · 소식을 전하려

었지만, 2차 대전이 끝난 뒤의 위안부들은 일본군에게 버림받고, 본국 정부

위안부들에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바람에 결국 고국으로 돌아

오지 못한 채, 故 이수단 할머님은 평생 중국에서 생활하셨었다.

 

그 후 2,005정부의 도움으로 한국 국적을 회복했었지만, 고령

에다 기력이 떨어져 고국의 땅을 밟진 못하셨었다.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는 故 이수단 할머님이, “ 우리 말

잊으셔서 가슴속 맺힌 한을 우리말로 풀지 못하시

많이 안타까워 하셨다고 한다 ” 고 전했었다.

 

그리고 故 이수단 할머님은, 중국의 경로원장이 선물해 주었던 인

형을,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다고 한다. 

 

故이수단 할머니는 알츠하이머, 정신분열증, 대퇴골 골절 등으로 건강이 쇠약해서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 이 할머니는 유독 아기 인형을 아꼈다. 안세홍 사진작가

 

故 이수단 할머니는,츠하이머 · 정신분열증 · 대퇴골 골절

등으로 건강이 쇠약해서 힘겨운 사투를 벌였었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 할머님의 그림 - 태워지는 처녀들. 

조정래 영화감독은, 2,012年 ‘ 퇴촌, 나눔의 집 ’ 에 봉사활동을 갔다 이 그림을 보곤 ‘ 귀향 ’ 이란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국민 모금으로 14년만에 그 영화를 완성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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