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김순덕 할머님의 그림 - 만남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4
故 배춘희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배춘희 할머님은, 2,014年 6月 8日
새벽 5시께 나눔의 집에서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나셨었다.
고향이 경북 성주인 故 배 할머님은, 19살 때부터 중국 만주에서 강제 위안부로
고초를 겪곤, 광복 이후 중국과 일본 생활을 거쳐 1,981年 귀국해
1,997年부터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지내셨었다.
故 배 할머님은,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3년 전부턴 ‘ 수요집회 ’
에도 참석하지 못하신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었다.
故 배 할머님은, 평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작품도 남겨셨으며, 일본어 · 중국
어 등 어학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여셨던 것으로도 전해졌었다.
특히, 2,012年 일본군의 ‘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 ’ 에게 지급되는 생활안정 지
원금을 아껴 한 불교대학에 장학금으로 3천만 원을 기부하기도 했었다.
故 김순덕 할머님
그림을 통해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들의 피해 실상을, 전세계에 알렸었던 故 김순덕(83)
할머님이 2,004年 6月 30日 오후 1시 55분쯤 서울 아산병원에서 별세하셨었다.
경기도 광주 ‘ 나눔의 집 ’ 에서 생활하셨던 故 김 할머님은, 이날 아침 갑자
기 뇌출혈로 쓰러진 뒤 끝내 의식을 되찾진 못하셨었다고 한다.
1,921年 경상남도 의령에서 2남 3녀의 둘째딸로 태어난 故 김 할머님은, 17살 때 취
직을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일본 나가사키로 끌려간 뒤 3여年 동안 중국 상
하이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으셨었다.
1,940年 20세에, 한 일본 군인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뒤 50여 年이 지난 1,993年
에야 겨우 일본군의 ‘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 로 등록하셨었다.
故 김 할머님은, 잔혹했던 일본군의 ‘ 종군 강제 위안부 생활 ’ 을 그림을 통해 표현하셨었다
일본군에 손목이 잡힌 채 위안부로 끌려가는, 한 처녀의 슬픔을 담은 ‘ 끌
려감 · 못다 핀 꽃 ’ 등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故 김 할머님은,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도 매주 참여하시어 일본 정부
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하셨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었다.
故 심달연 할머님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 종군 강제 위안부로 사셔야 했었던 故 심 할머님은,
한많은 생을 뒤로한 채 2,010年 12月 간암으로 생을 마감하셨었다.
13세였던 故 심달연 할머님은, 나물을 캐다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로 끌려가셨었다.
故 심 할머님은, 종군 위안소의 충격으로 정신착란 상태로 지
내다, 동생의 극진한 노력으로 차츰 회복됐었다.
故 공점엽 할머님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공점엽 할머님은 향년 96세 때인
2,016年 5月 17日 오후 5시 10분께 지병으로 별세하셨었다.
1,935年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셨던 故 공점엽 할머님은, 16살이 되던
어린 나이에 비단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일본군에
게 끌려가 24살이 되던 1,943年 무렵까지 일본군 위안
부로 모질고 ·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했었다.
1,945年 해남으로 귀국해, 1,947年 결혼했었으나 결혼 8年만에
남편이 숨지면서, 아들을 홀로 키우며 살아왔었다.
故 공점엽 할머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해 왔었으
며, 그 뇌졸중이 악화돼 그만 세상을 떠시고 말았었다.
故 공점엽 할머님이, 아들과 함께 하셨던 생전 모습
故 공점엽 할머님의, 95번째 생신잔치 때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