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님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6
일본군 위안부란?
당시 일본군의 만행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서도 잘 나타난다.
일본은, 한국 · 대만 등지의 여성들을 데려가 산부인과와 같은 곳에서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수술을 시킨 다음, 군수품 마냥 성 노예로써 하루
100명 정도의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것은 물론이
거니와 폭행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 임신한 위안부 여성을 일본군 두 명이 끌고 가더니,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끈으로 묶은
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그 여성의 배에 칼을 꽃아, 아이가 죽은 채로 튀어나오
게 했다 ” 라는, 할머니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인들이 저지
른 만행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일본정부는, 공식적인 사과 한 마디 없었고 · 마지못해 일본
민간인들이 위안부들에게 위로금 형식으로 모금하여 보상금이라는 명목으
로 전달했을 뿐,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받지 못한 상태다.
故 황선순 할머님
2,015年 1月 26日,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황선순 할머님은 향년 89세로 그만 작고하셨었다.
공교롭게도, 1年 전 故 황금자 할머님(당시 90세)이 돌아가셨던, 바로 그 날에.
故 황선순 할머님은, 지난 1,926年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셨었다.
故 황선순 할머님은, 부모님을 일찍 여읜 후 남동생과 함께 살며 17살 때 고모집
으로 밥을 얻어 먹으러 가던 중, 부산에 있는 고무공장에 취직시켜 주겠
다는 이웃의 말에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가게 되셨다고 한다.
故 황선순 할머님은, 부산과 일본을 거쳐 남태평양 작은 섬 나우루에 있는 위안소
에 동원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3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했었다.
어렵게 돌아온 고국, 그러나 할머님에게 남은 것은 가난 그리고 뇌
경색과 당뇨 등 셀 수 없이 많은 질병 뿐이었다.
하지만 故 황선순 할머님은,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결혼해 얻은 2남 4녀를 꿋꿋하게 키웠었다.
헌데 잊으래야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故 황선순 할머님은 인터뷰 당시 치매 초기였음에도
위안부 시절 보았던 일본군의 배와 비행기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했었다고 한다.
故 황선순 할머님의 아들은 “ 우리 집, 찾아간다 ” 라며, 집 밖으로 도망을 가는 어
머님이 걱정돼, 24시간 내내 할머님의 곁을 지켜야만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故 황선순 할머님의 빈소는, 전남의 한 병원에 마련됐었으나 · 영결
식은 유가족의 뜻에 따라 비공개로 엄수됐었다고 한다.
2,013年 4월 5일, 전남 화순군 능주면 자택에서의 故 황선순 할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