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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8

타계한 위안부들

by tl3659\0\0 2017. 6. 3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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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김군자 할머님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8

 

 

 

메인이미지

 

박숙이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박숙이 할머님도, 향년 94

병원에 원해 청각 · 시각장애와 고혈압 등 지병으로 치료

받아오시다, 병세가 악화돼 2,016126

저녁 8시경, 그만 작고하셨었다고 한다.

  

1,923, 故 박숙이 할머님은 경남 남해군 고현면 관당마을에서 태어나, 16살

때 사촌언니와 함께 고현면 바닷가에 조개를 캐러 가던 길, 에 칼을

겨누던 본군인에게 영문도 모른 막무가내로 트럭에

, 해방이 될 때까지 중국 만주로 끌려가 무려 7년간

이나 지옥같은 고초를 겪으셨었다고 한다.

 

그 이후 故 박숙이 할머님은, 고향으로 돌아와 생활하시던 중 문병왔었던 영일 남

해군수가 소녀상 건립을 추진해, 남해읍 아산리 남해 여성인력 센터

앞 소공원 487㎡에 그 소녀상이 건립돼, 그 소녀상의 실제 주인

공이시기도 한 故 박숙이 할머님은, 지난 광복 70돌 때

평화의 소녀상 ’ 제막식을 열기도 .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은, 故 박숙이 할머님께서 생전에 “ 일본,

해자들에게 사과하 · 잘못했다고 빌어야 한다. 다시는,

쁜 짓하지 말아야 한다 ” 라고 말했다고 전했었다.

 

 또한 故 박숙이 할머님은, “ 남해 숙이공원 소녀상 아래 묻어

달라 ” 라고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었다.

 

 

故 박숙이 할머님은, 존재 그 자체로 질곡의 한국 근현

사 ‘ 증거 ’ 이자 ‘ 기억 ’ 의 증인이 됐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에 끌려가 무참히 짓밟힌 증거였고, 반겨주지 않는 조

국에 돌아와 수십년의 세월을 견뎌내면서도,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알

리기 위해 강제연행을 스스로 기억해야만 하는 존재였었다.

 

그녀, 그렇게 살아왔었다.

박숙이 할머님이, “ 일본에, 빳빳하게 고개 들고 살아야 한다. 나라 없는 백,

마나 불쌍한지 아느냐? 공부 열심히 해서, 큰 인물이 되고 ·

라 만들어라 ” 라고 청소년들에게 말했던 이유이기도 했었다.

 

故 박숙이 할머님은, 마음으로 낳은 자식들을 기르고 · 청소년들에게 장

금을 내놓고 · 자신과 같은 처지의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위해 평생을 바친 뒤, 한 그루 나무로 돌아갔었다.

 

해서, 자기 이름을 딴 숙이공원에 묻히고 싶다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던, 남은 사람들은 흐느껴 울었었다.

 

남해 숙이공원에서, 故 박숙이 할머님이 소녀상을 만져 보는 생전의 모습

 

故 박두리 할머님의 흉상

 

박두리 할머님

 

2,006219오후 620분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한많은 삶을 사셨던 故 박두리 할머님

향년 83세의 일기로, 끝내 생을 마감하셨었다고 한다.

 

정대협에 따르면, 故 박두리 할머님은 1,924 경남 밀양 출생으로 1,9

4017살에 진에서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끌려가,

 대만에서 때까지 ‘ 성노예 ’ 생활을 하시면서 구

폭력 후유으로 인한 척추질환과

염 등을 앓으며, 절되는

정신· 육체적 고통을

겪으셨다고 한다.

 

특히 2,003부턴, 지병으로 계속적인 투병생활을 하시면서도 내일

데모 있제, 데모?라며, 일본 대사관 앞에서 리는 정신대

할머님들의 수요집회를 그리하신 것으로, 정대

협의 ‘ 병상일지 ’ 엔 기록돼 있다고 한다.

 

나눔의 집에서 기억하는 故 박두리 할머님의 애칭은, 청소반장이었다

  

김연희할머니.jpg

 

김연희

  

2,015 6 24,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김연희 님도

세로 83뇌혈관성 치매 등 노인성 질환으로 오랫동치료를 받았

, 에는 소화기능이 떨어져 식사를 하지 못하고 겨우 연

중 폐렴까지 심해져, 결국 사망하셨었다고 한다.

 

살이 되던 年 초등학교 학년김연희 할머님은, 경북 대구 출신으로 121,9445

재학 중에 독립을 하던 부친이 중국으로 피신했다는 이유로일본,

교장에, 도야마 현의 비행기 부속을 만드는

공장에서 9일을 하다가아오모리 현으로,

끌려부 생활을 하셨었다고 한다.

 

광복 후 부산서울 대구 등에서 김연희 할머님은, · · 주로 가사

도우미로 일하셨으며위안부 피해 당시 입었던 , 트라우마

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결혼·

못해 평생 홀로 보내신 것으로 전해졌었.

 

서울 추모공원에서 화장을 한 후 천안 망향의유족 측은 ,

산에 안치할 계획이라고 밝혔었다고 한다.

 

 

故 박유년 할머님

  

2,0158 8 · · 새벽 3 25분경(한국시간), 미국의 애리조나주 메사츄

세츠에서 하시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박유년

할머님, 세에 사망하시어 운명을 달리하셨었다고 93한다.

 

박유년 할머님은, 폐와 심장에 물이 차는 증세를 보이는 등 건강이 좋지

못해 차례나 응급실에 입원하며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4, 넘기시

다 결국 병세가 악화돼 돌아가시게 되셨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로 故 박유년 1,9938정부에 등록된,머님

1,922年 경남에서 태어나 당시 살이던19 年 친구와 1,941같이 부산에 놀

갔다가 일본군 원으로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속아 일본인에게 소개됐고, 한국여성명과 6함께 중국

광동일본군의 ‘ 성노예 ’ 생활을 강요당했었다.

 

이후 박유년 할머님은, 광복되기 직전 싱가포르로 강제 이동

돼 계속 위안부 생활을 하시다 본 패전 후인 1,945

에야 겨우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귀국 후엔, 고향으로 돌아가긴 돌아갔었으나 집에선 머물 수

없어 부산으로 나와 생활하시,경기도 파주로 옮겨

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셨었다고 한다.

 

양아들이 생활하는 미국 애리조나주로 거그러다 2,007이후에는,

주지를 옮겨양아들 부부와 함께 생활하셨었다고 한다, .

 

집 가까운 공원에 안장할 계획이라고 밝혔었다고 한다유족 측은, .

 

김복동 독도는 우리땅.jpg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님의 그림 -독도는 우리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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