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공점엽 할머님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5
故 김복선 할머님
2,012年 12月 12日,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김복선(86) 할머님은,
서울 강서구의 한 요양병원에서 오전 7시 경에 그만 작고하고 말으셨었다.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셨던 故 김복선 할머님은, 18살에 취직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위안소에 가게 되셨었다.
故 김복선 할머님은, 부산 수용소에서 오사카 · 사이공을 거쳐
미얀마의 일본군 위안소까지 끌려 다녔었다.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는, “ 모진 세월을 겪으신 할머님께선, 요양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셨었다. ” 라며 “ 얼마전 건강 상황이 안 좋아져 중환자
실로 옮기셨고,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라고 밝혔었다.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관계자는, “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
마다 열리는 ‘ 수요집회 ’ 를 다녀왔는데,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지도
못한 속에 할머님께서 돌아가셔서 안타깝다 ” 라고 말했었다.
수요집회 때, 故 김복선 할머님의 생전 모습
故 이용녀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이용녀 할머님은, 2,013年
8月 11日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나셨었다.
경기도 광주 퇴촌면 할머님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은, 故 이용녀 할머님
이 경기도 의료원 포천병원에서 운명하셨다고 밝혔었다.
故 이용녀 할머님은, 6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일본의 공식
사과를 끝내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으셨었다.
故 이 할머님은, 1,926年 2月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16세 때 위안부로 끌려갔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일본에서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말에 따라 나섰었지만, 부
산항에서 배를 타고 한 달을 걸려 도착한 곳은 미얀마 양곤이었다.
故 이용녀 할머님은, 그곳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고초를 겪
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年 귀국했었다.
故 이 할머님은, 특히 일본의 전쟁 범죄를 고발하고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투쟁에 앞장섰었다.
故 이 할머님은, 1,995年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며 일본군의 비인도적 만행
을 국제사회에 알리는데 힘쓰다, 2,000年 12月 일본 도쿄 구단회관에
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에 참석해 증언했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의 위안부 강제 동원은 국제법상 전쟁 범죄 반인도 범죄임을 명확히 했었다.
그리고 故 이용녀 할머님은, 위안부 피해 후유증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며 몇 차례 나눔의 집에서 입 · 퇴소를 반복하기도 했었다.
故 이 할머님은 나눔의 집이 1,992年 10월 서교동에서 시작, 혜화동 명륜동을
거쳐 1,995年 경기도 광주 원당리에 이주했을 때 신축 공사 현장인
원당리에서 천막생활을 하면서 건축 일을 돕기도 했었다.
그러나 故 이용녀 할머님은, 여생을 아들과 보내고 싶다
는 평소 뜻에 따라 나눔의 집을 퇴소했었다.
하지만 2,013年 8月 11日,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이용녀 할머님
(87)은, 끝내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지 못한 채 별세했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었던, 故 이용녀 할머님의 노제
故 최선순 할머님
2,013年 8月 24日 오후 5시 30분경,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최
선순 할머님이 향년 87세로, 노환과 지병으로 인해 생을 마감했었다.
1,927年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최 할머니는, 16살 때 일본군이 처녀들을 잡아간
다는 소문에, 잡혀가지 않으려 숨어서 지내다 1,942年 아버지가 아파 장
에 약을 사러 갔다가, 강제로 연행되어 위안소로 끌려가 모진 나
날을 보내다, 3年 뒤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었다.
해방 후, 위안부 시절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투입됐었던 아편으로 인해 중독됐었
던 그 아편도 끊고, 전남 광주에서 자리를 잡아 역시 전쟁 피해자였던 남
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려 아들 2명과 딸 3을 낳았었다.
故 최선순 할머님은, 퇴행성 관절염을 겪으면서도 매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는데 동참하셨었다.
가족들에 의하면, 故 최선순 할머님은 같은 위안부 피해자셨던 故 이용녀
할머님을 잃은 충격으로 치매 증상까지 보였다고 말했었다.
전북 고창군 고인돌 장례식장에서 엄수된, 이 세상에선 맨마지막인 故 최선순 할머님의 모습
故 이효순 할머님
2,015年 5月 27日,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慰安婦) 피해자인 故 이효
순 할머님은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도 받지 못한 채 향년 91세로
경남 창원시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뒀었었다.
1,925年 경남 의령 출신인 故 이효순 할머님은, 1,941年 17살 때 마을 냇가
에서 빨래를 하다가 같은 동네 처녀 3명과 함께 사복차림의 일본
인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했었다.
2,013年 11月 6日 요양병원에서 치료 중이시던 고 이효순 할머님은, “ 동네 도
랑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차를 끌고 온 사복차림의 일본인 2명이 다
짜고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끌고 갔다 ” 라고 구술했었다.
당시 함께 끌려갔던 다른 여성 1명은, 차에서 뛰어내려 달아났다.
그러나 故 이효순 할머님과 다른 여성 1명은, “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고 · 무서워서 물어보지도 못했다 ” 라며 “ 부산에 도착해
서, 일본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다 ” 라고 기억했었다.
그 이후 故 이효순 할머님은, 4年간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중
국 · 싱가포르 · 베트남 등지의 위안소를 전전해야만 했었다.
헌데 故 이효순 할머님 끌려간 그 이후, 할머님의 오빠도 일본군에 강제징용돼 목숨을 잃
어, 할머님의 집안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돼버리고 말았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가까스로 고향 땅을 다시 밟은 故 이효순 할머님은, 경남 합천에서
결혼생활을 했었어지만 남편을 먼저 앞세워야만 했었다고 한다.
해서 故 이효순 할머님은, 홀로 서울 시내를 전전하시다 2,007年
부터 여동생이 거주하는 창원시로 거처를 옮겼었다고 한다.
그러다 혈전증 등을 앓고 있던 故 이효순 할머님은, 최근 고
령으로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었다.
평소 과거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하시던 故 이효순 할머님은, 아시아 경제 신문
과의 인터뷰에선 위안부 문제를 사과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해 “ 즈그들
, 뺏기기 싫으니까 그렇지 ” 라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셨었다.
故 이효순 할머님의 장례는, 시민사회 단체장으로 엄수됐었다.
故 이효순 할머님의, 시민사회 단체장인 영결식 장면
미군이 설치한, 제 1 오키나와 포로수용소.
배봉기 할머님을 비롯한,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 여성 다수가 이곳을 거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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