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김순덕 할머님의 흉상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9
故 최금선 할머님
2,015年 7月 5日 밤 11시 20분경, 패혈증과 폐렴으로 오랫동안 치료를 받으
시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최금선 할머님도
향년 90세로 사망해 운명을 달리하셨었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2,003年 3月 정부에 등록된 故 최금선 할머님은, 1,925年 생으로 당
시 16살이던 1,941年에 목욕하기 위해 친구 집에 가다가 강제 동원돼, 중국 하얼빈 텐
츠가이에서 1,942年까지 ‘ 성폭력 · 성노예 ’ 생활을 강요당하셨었다고 한다.
故 최금선 할머님은, 위안소 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워 도망치다 붙잡혀 매를 맞기도 하시
다 결국 1,942年 도주에 성공해 평양으로 돌아오셨었지만, 일본군에 잡히는
것이 두려워 집으로 돌아가진 못하고, 황해도 겸이포에서 1년 동
안 찻집 종업원으로 일하며 생활하셨었다고 한다.
헌데 그 때 故 최금선 할머님은, 남편을 만나 서울로 옮겨 19살 때쯤 결혼을 해
슬하에 딸(양녀) 하나를 두어, 그 딸을 키우며 사셨었다 한다.
그러다 故 최금선 할머님은, 2012年 12月부터 패혈증과 폐렴 등으로 병원 중환
자실에 장기입원을 하셨었고, 2013年 1月에는 위독하여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는 등 그동안 여러 번 고비를 맞으시다, 결국 이
한많은 세상을 등진 채 눈을 감으셨었다고 한다.
유족 측은, 화장 후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치할 계획이라고 밝혔었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피
해자의 명예를 짓밟은 책 ‘ 제국의 위안부 ’ 의 폐기와, 저자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사죄를 촉구하고 있는 모습.
나눔의 집은, 서울 세종대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 우리나라 교수가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하는 얘기를 당당하게 얘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 이라고, 박유하 교수를 규탄하며 · 사죄를 촉구했었다.
故 김군자 할머님
2,017年 7月 23日,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김군자 할머님은 향년
91세에 고령으로 인한 고혈압 · 만성기관지 천식 등인 노환이 악화돼 오
전 7시 51분경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운명을 달리하셨었다.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셨던 故 김군자 할머님은,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친척 집에
서 생활하시다가 17살 때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었다.
그러나 몇 번의 탈출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었고, 그 때마다 구타를 당해 왼
쪽 고막이 터진 故 김군자 할머님은 평생 왼쪽 귀가 들리지 않으셨었다.
그리고 위안부 생활 3年 동안, 故 김군자 할머님은 7번의 자살 시도도 하셨었다.
그리고 그 이후 故 김군자 할머님은, 1,998年부터 위안부 피해자 할
머님들의 공동거주 시설인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셨었다.
헌데 故 김군자 할머님은, 생전 미 의회 청문회에서 끔찍했던 과거사를 생
생히 증언해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인물이셨었다.
그리고 故 김군자 할머님은, 지난 2,007年 2月엔 마이크 혼다 미국 연방 하원 의원이 주최한 미 의
회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 광복 후, 38일을 걸어 조국에 돌아왔다 ” 라며 “ 위안소
에서 하루 40여 명을 상대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 라고도 증언하셨었다.
故 김군자(요안나) 할머님의 장례미사는, 2,017年 7月 25日 오전 10시 30분 경기도 광
주시 퇴촌성당에서 천주교 수원교구장 이용훈(마티아) 주교의 주례로 봉헌됐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수원교구의 ‘ 특별 은인 ’ 이셨던 故 김군
자 할머님을 예우하기 위해 미사를 마련했다고 했었다.
아름다운 재단은, “ 故 김군자 할머님은 재단의 1호 기금 출연자셨다 ” 면서 “ 故 김군자 할
머님은, 평생 모은 돈을 장학사업에 써달라며 기부하신 분 ” 이셨다고 밝혔었다.
故 김군자 할머님은, 아름다운 재단이 창립된 직후인 2,000年 8月 평생 모은
돈 5천만 원을 기부해 ‘ 김군자 할머님 기금 ’ 이 조성되도록 하셨었다.
故 김군자 할머님은, 13살에 부모를 여의어 8개월간 야학에 다닌
것이 배움의 전부였을 정도로 어렵게 사셨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故 김군자 할머님은, “ 보육시설에서 자란 대학생들 학비를
지원해 달라 ” 라며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셨었다고 한다.
그리고 故 김군자 할머님의 기부 소식이 전해진 후론, 17年
동안 많은 시민이 기금에 돈을 보탰었다고 한다.
그러자 故 김 할머님도, 2,006年 5천만 원을 추가로 다시 또 기부하셨었다.
아름다운 재단은, 올해 7월 현재 ‘ 故 김군자 할머님 기금 ’ 의 누적 모금액은 약 11억 원에
달하고, 기금을 통해 학비 지원을 받은 장학생은 약 250명에 이른다고 밝혔었다.
김군자 할머님의 기금
장학생들의 발길이 잇따른 것으로 전해졌었다.
면서
“ 어떤 돈으로 공부했는지 알기에, 더 열심히 살고 있다 ” 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재단 관계자는, “ 올해 5월 할머님 생신 때, 재단 간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할
머님은 ‘ 내 삶이 한스러울 때도 많았지만, 돌아보니 가진 것을 다
줘서 후회는 없다 ’ 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었다고 한다.
故 이기정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성노예제(위안부) 피해자인 故 이기정 할머님도, 2,017年
11月 11日 향년 93세에 노환으로 영면하셨었다.
故 이기정 할머님은,
1,925年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15살에 간호사가되고 싶어 고향을 떠났다가, 19살 즈음인 1,943年경 서울의
한 소개소에서 일본 군인들의 옷을 세탁하는 일을 할
것이라는, 취업사기에 속아 강제동원됐었다.
당시, 가족들은 몰랐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故 이기정 할머님은, 기차 · 배 · 트럭을 번갈아 타곤 부산을 거쳐 싱가포르
와 버마(미얀마)의 군전용 위안소에서 일본군들의 ‘ 위안부 ’ 생활을 강요받았
으며, 미얀마에서 해방을 맞이한 뒤 군함을 타곤 부산에 도착하셨었다.
해방 후엔,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돈을 마련해 고향인 당진으로 돌아가셨었다.
그리고 고향에서 결혼을 하셨었지만, 위안부 피해로 불임이 돼 자녀를 낳을 순 없으셨었다.
게다가, 중풍으로 오른손을 사용할 수도 없으셨었다.
즉슨 고향에서 조차도, 어려운 삶을 살아야만 하셨던 故 이기정
할머님은 2,005年 뒤늦게 강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안 이복 동생이 정부에 신고해 등록되셨었다.
그동안 고향인 당진에서 따로 거주하셨던 故 이기정 할머님은, 낙상사고로 관절을 심
하게 다쳐 거동이 불편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의 거주 시설인 ‘ 나눔의
집 ’ 에 들어가, 다른 피해 할머님들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 상의
를 하시던 중에, 갑작스럽게 타계를 하셨었다고 한다.
나무막사로 지어진, 상해 육군 오락소
각 방에, 위안부를 한 명씩 넣어두곤 군인들을 받게 했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위안소 형태 외에도 중국인 집이나 상가를 이
용하든가, 전방에서는 천막으로 급조하여 사용했었다.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11 (0) | 2017.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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