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3

타계한 위안부들

by tl3659\0\0 2014. 1. 27. 22:52

본문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강덕경 할머님의 그림 - 빼앗긴 순정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3

 

 

 

 

 

故 이복순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故 이복순 할머님은 아흔

이던 2,011 6 20日에 세상을 뜨셨었다.

경남 창녕 출신인 故 이복순 할머님은, 어렸을 때 위안부로 끌려가

중국 소재 위안소에서 생활하다 해방된 뒤 귀국하셨었다.

 

故 이복순 할머님은, 귀국 뒤 대구에서 사시다가 한 때 고향에남동생과 함께 사시기도 하셨었.

남동생 부부들이 사망한 뒤론, 요양원에서 지내셨었다.

장례식은, 마산 · 창원 · 진해 시민모임(대표 이경희)관계자

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었으며, 시신은 화장됐었다.

 

 

황금자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황금자 할머님은 2,014 1 26· 오전 1 30

분께 향년 90세에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운명하셨었다.

1,924年 함경도에서 태어나신 황 할머님은, 13살 때 길을 가다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흥남의 한 유리공장으로 끌려가셨었다.

3年 뒤에는, 간도 지방으로 옮겨져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하셨었다.

 

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황 할머님은, 가정을 꾸리지도 못한 채 평생을 홀로 사셨었다.

생전의 황 할머님은, 나라에서 지원하는 임대아파트에 사시는 여의치 않은 형편에도 불구

하고 빈병과 폐지를 주워 팔았으며 · 생활지원금도 쓰지 않고 전부 모아, 2,006

年과 2,008年 · 2,010年인 세 차례에 걸쳐 4천만원 · 3천만원 · 3천

원씩 총 1억원을  장학금으로 강서구에 기탁하셨었다.

 

그리고 황 할머님은, 2,011 12月엔 사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한 유언장을 작하셨었다.

당시 황 할머님은, 사후 임차 보증금과 은행예금 등을 포함한 재산 3,000여

만원을 재단법인 강서구 장학회에 기탁하기로 하셨다.

 

이러한 선행이 세간의 화제가 된 황 할머님은, 2,011 7 정부

로부터국민훈장 · 동백장을 받으셨었다.

 

위안부 피해자 최갑순 할머니 별세…생존자 46명 남아     (서울=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최갑순(96) 할머니가 5일 0시56분 별세했다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밝혔다.최 할머니는 노환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다고 정대협은 전했다. 빈소는 경기 남양주시 한양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이다. 이로써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46명으로 줄었다.   << 정대협페이스북 캡처 >>

 

최갑순 할머님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 故 최갑순(96) 할머님은, 2,015

12月 5· 056분에 별세하셨었다.

 

최 할머님은, 1,919전남 구례에서 태어나셨었다.

15세 때, 일본 순경이 아버지를 잡아가려고 집으로 찾아왔었지만, 아버지가 끌려가면 8명이나 

되는 식구의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어 결국 할머니가 끌려가셨었다고 한다.

 

할머님은, 만주 무단강(牡丹江 · 목단강)까지 끌려가 일본

군인만 근무하는 부대에서 위안부로 생활하셨었다. 

 

1,945, 해방을 맞은 뒤 3 ~ 4간 행상과 걸인으로 생활하시면서 계속 남쪽으로 걸어와 고

구례에 도착하셨었고, 이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시다 노환으로 오랫동안

석에 계시다 결국 2,015125056분에 별세하셨다. 

 

 

김외한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김외한 할머님(81)은, 2,015611· 

8 40분에 광주시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타계하셨었다. 

 

1,934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셨었던 김 할머님은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5

2· 11세 나이에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로 끌려가셨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위안부 생활을 견뎌내신 김 할머님은, 전후 징용을 다녀오신 

남편(89)과 만나 결혼한 뒤 경북 안동에서 살아오셨었다.

 

슬하에 4 1녀를 둔 김 할머니는, 1,998남편의 권유로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하셨었다.
위안부 할머님들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려셨었던  김 할머님은, 건강상태가 악화되

면서 2,012年 12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을 하셨었다.


김 할머님은위안소 생활 당시 일본군의 폭력과 강압적인 성관계로 질환을

얻어 평생을 고생하셨었다고 나눔의 집에서 전했었다.
김 할머님은 그 죽일 놈들이, 어린애를 데려다가 무자비하게 능욕했어. 그 놈들은, 사람도 아녀.

어렸을 적, 함께 놀던 친구들은 모두 끌려가서 죽고 나 혼자만 살아 돌아왔어. ” 라며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배상을 원했었지만 끝내 이뤄지진 않았다.

생전 김 할머님은 그 동안, 보이지 않는 많은 도움을 주신 사회에

송한 마음  이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었다.

 

 

김우명달 할머님

 

2,007 313,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김우명달 할머님도 타계하셨었다.

 

경남 산청에서 사셨었김우명달 할머님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

만주 봉천에서 모진 고통을 겪으셨으며, 해방 후에도 온갖 후

유증에 시달리시다, 지병으로 자택에서 운명하셨었고 한다.

 

 

故 문필기 할머님

 

2,00835,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공동체인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셨던 故 문필기 할머님도 지병으로 타계하셨었다.

 

1,9256 18생인 故 문필기 할머님은,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 358번지

에서 태어나, 18살이 되던 해인 1,943年 가을에 강제 동원돼, 중국 만주

(길림성 장춘)에서 2年간 ‘ 성폭력 · 성노예 ’ 생활을 강요

받다, 20살이 되던 1,945年에 귀국하셨었다.

 

그리고 1,992 6月에 피해자 신고를 해, 1,9938 31日에 일본군의 종

강제 위안부 피해 대상자 결정 통지서를 받으셨었다고 한다.

 

그러다 2,003 109나눔의 집에 입소하시어,

계하실 때까지 생활하셨었다고 한다.

 

 

故 김달선 할머님

 

2,015611, 경북 포항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신 일본

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故 김달선(91) 할머님.

 

김 할머님의 발인제 땐, 할머니의 한 많은 삶을 위로하는 조사

(弔辭) 형태의 짧은 글을 읽어 고인을 추모하려 했었지만,

유족들의 오열로 조사를 읽진 못했었다고 한다.

 

김 할머님은, 생전 자신이 사망하면 유골을 할머니 묘 근처에 뿌려

달라는 말을 수차례 하셨었다고 유족들은 전했었다고 한다.

 

사진은,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회원들이, 김 할머님이 입원하셨

었던 한 병원에서 생일잔치를 했었을 때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순덕 할머님

 

2,017 4 4,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순덕 할머님(99세)별세하셨었다.

 

1,918年 生이 할머님은,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 중 최고령이셨었다고 한다.

이 할머님은, 서울 마포구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 평화의 우리 집’ 에 거주하셨었다고 한다.

 

이 할머님은, 16세이던 1,934年 일본군에 끌려가 고초를

겪으시다 1,945年 해방 이후 귀국하셨었다고 한다.

 

그리고 故 이 할머님은, 1,991年 일본 야마구치 현에서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 9명과 소송을 시작하셨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故 이 할머님은, 1,998年 광복 이후 처음으로 30만엔의

배상금 지급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하셨었다고 한다.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 -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강연회

문서와 사 · 증언으로 보는 ‘ 위안부 ’ 이야기 라는 강연회 때, 복동 할머님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