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강덕경 할머님의 그림 - 빼앗긴 순정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3
故 이복순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이복순 할머님은 아흔
살이던 2,011年 6月 20日에 세상을 뜨셨었다.
경남 창녕 출신인 故 이복순 할머님은, 어렸을 때 위안부로 끌려가
중국 소재 위안소에서 생활하다 해방된 뒤 귀국하셨었다.
故 이복순 할머님은, 귀국 뒤 대구에서 사시다가 한 때 고향에서 남동생과 함께 사시기도 하셨었다.
남동생 부부들이 사망한 뒤론, 요양원에서 지내셨었다.
장례식은, 마산 · 창원 · 진해 시민모임(대표 이경희) 등 관계자
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었으며, 시신은 화장됐었다.
故 황금자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황금자 할머님은 2,014年 1月 26日 · 오전 1시 30
분께 향년 90세에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운명하셨었다.
1,924年 함경도에서 태어나신 故 황 할머님은, 13살 때 길을 가다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흥남의 한 유리공장으로 끌려가셨었다.
3年 뒤에는, 간도 지방으로 옮겨져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하셨었다.
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故 황 할머님은, 가정을 꾸리지도 못한 채 평생을 홀로 사셨었다.
생전의 故 황 할머님은, 나라에서 지원하는 임대아파트에 사시는 여의치 않은 형편에도 불구
하고 빈병과 폐지를 주워 팔았으며 · 생활지원금도 쓰지 않고 전부 모아, 2,006
年과 2,008年 · 2,010年인 세 차례에 걸쳐 4천만원 · 3천만원 · 3천
만원씩 총 1억원을 장학금으로 강서구에 기탁하셨었다.
그리고 故 황 할머님은, 2,011年 12月엔 사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한 유언장을 작성하셨었다.
당시 故 황 할머님은, 사후 임차 보증금과 은행예금 등을 포함한 재산 3,000여
만원을 재단법인 강서구 장학회에 기탁하기로 하셨다.
이러한 선행이 세간의 화제가 된 故 황 할머님은, 2,011年 7月 정부
로부터 ‘ 국민훈장 · 동백장 ’ 을 받으셨었다.
故 최갑순 할머님
일본군 ‘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 故 최갑순(96) 할머님은, 2,015年
12月 5日 · 0시 56분에 별세하셨었다.
故 최 할머님은, 1,919年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셨었다.
15세 때, 일본 순경이 아버지를 잡아가려고 집으로 찾아왔었지만, 아버지가 끌려가면 8명이나
되는 식구의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어 결국 할머니가 끌려가셨었다고 한다.
故 최 할머님은, 만주 무단강(牡丹江 · 목단강)까지 끌려가 일본
군인만 근무하는 부대에서 위안부로 생활하셨었다.
1,945年, 해방을 맞은 뒤 3 ~ 4年간 행상과 걸인으로 생활하시면서 계속 남쪽으로 걸어와 고
향 구례에 도착하셨었고, 이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시다 노환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계시다 결국 2,015年 12月 5日 0시 56분에 별세하셨다.
故 김외한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김외한 할머님(81)은, 2,015年 6月 11日 ·
오후 8시 40분에 광주시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타계하셨었다.
1,934年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셨었던 故 김 할머님은,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5年
2月 · 11세 나이에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로 끌려가셨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위안부 생활을 견뎌내신 김 할머님은, 전후 징용을 다녀오신
남편(89)과 만나 결혼한 뒤 경북 안동에서 살아오셨었다.
슬하에 4남 1녀를 둔 故 김 할머니는, 1,998年 남편의 권유로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하셨었다.
위안부 할머님들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려셨었던 故 김 할머님은, 건강상태가 악화되
시면서 2,012年 12月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을 하셨었다.
故 김 할머님은, 위안소 생활 당시 일본군의 폭력과 강압적인 성관계로 질환을
얻어 평생을 고생하셨었다고 나눔의 집에서 전했었다.
김 할머님은 “ 그 죽일 놈들이, 어린애를 데려다가 무자비하게 능욕했어. 그 놈들은, 사람도 아녀.
어렸을 적, 함께 놀던 친구들은 모두 끌려가서 죽고 나 혼자만 살아 돌아왔어. ” 라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배상을 원했었지만 끝내 이뤄지진 않았다.
생전 故 김 할머님은 “ 그 동안, 보이지 않는 많은 도움을 주신 사회에
죄송한 마음 ” 이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었다.
故 김우명달 할머님
2,007年 3月 13日,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김우명달 할머님도 타계하셨었다.
경남 산청에서 사셨었던 故 김우명달 할머님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
시어 만주 봉천에서 모진 고통을 겪으셨으며, 해방 후에도 온갖 후
유증에 시달리시다, 지병으로 자택에서 운명하셨었다고 한다.
故 문필기 할머님
2,008年 3月 5日,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공동체인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셨던 故 문필기 할머님도 지병으로 타계하셨었다.
1,925年 6月 18日 생인 故 문필기 할머님은,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 358번지
에서 태어나, 18살이 되던 해인 1,943年 가을에 강제 동원돼, 중국 만주
(길림성 장춘)에서 2年간 ‘ 성폭력 · 성노예 ’ 생활을 강요
받다, 20살이 되던
1,945年에 귀국하셨었다.
그리고
군 강제 위안부 피해 대상자 결정 통지서를 받으셨었다고 한다.
그러다 2,003年 10月 9日 나눔의 집에 입소하시어, 타
계하실 때까지 생활하셨었다고 한다.
故 김달선 할머님
2,015年 6月 11日 밤, 경북 포항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신 일본
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김달선(91) 할머님.
故 김 할머님의 발인제 땐, 故 김 할머니의 한 많은 삶을 위로하는 조사
(弔辭) 형태의 짧은 글을 읽어 고인을 추모하려 했었지만,
유족들의 오열로 조사를 읽진 못했었다고 한다.
故 김 할머님은, 생전 자신이 사망하면 유골을 할머니 묘 근처에 뿌려
달라는 말을 수차례 하셨었다고 유족들은 전했었다고 한다.
사진은,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회원들이, 故 김 할머님이 입원하셨
었던 한 병원에서 생일잔치를 했었을 때의 모습이라고 한다.
故 이순덕 할머님
2,017年 4月 4日,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이순덕 할머님(99세)도 별세하셨었다.
1,918年 生인 故 이 할머님은,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 중 최고령이셨었다고 한다.
故 이 할머님은, 서울 마포구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 평화의 우리 집’ 에 거주하셨었다고 한다.
故 이 할머님은, 16세이던 1,934年 일본군에 끌려가 고초를
겪으시다 1,945年 해방 이후 귀국하셨었다고 한다.
그리고 故 이 할머님은, 1,991年 일본 야마구치 현에서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 9명과 소송을 시작하셨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故 이 할머님은, 1,998年 광복 이후 처음으로 30만엔의
배상금 지급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하셨었다고 한다.
문서와 사진 · 증언으로 보는 ‘ 위안부 ’ 이야기 라는 강연회 때의, 김복동 할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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