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주페(Suppe) - 오페레타, 경기병 中 서곡
故 Franze von Suppe - Light Cavalry, Overture to the Operetta
바이올리니스트 : 앙드레 류(Andre Rieu · 1,949 ~ )
故 주페, 경기병 中 서곡
바로 이 곡은, 故 프란츠 폰 주페(Franze von Suppe · 1,819 ~ 1,895 · 오스트리
아)가 타슈켄트 등 헝가리 춤곡 선율을 사용해 1,866年에 만든 희가극으로,
빈의 시인이었던 故 코스타의 대본에 의한 군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서곡은, 극중에 나오는 다섯 개의 주요 테마들을 발췌해 세도막 형식으로 트
럼펫과 호른이 신호 나팔처럼 드높이 울리고 트롬본이 이에 답한다.
뒤이은 행진곡은, 말발굽 소리를 연상시키면서 경기병의 행진을 묘사한다.
전쟁에서, 죽은 전우를 애도하는 듯한 조용한 단조의 헝가리풍 선율이 첼로와 바이
올린으로 연주되며, 다시 경쾌한 행진곡과 장대한 클라이맥스로 마무리된다.
이 서곡은, 극중의 주요가락들을 다섯 종류로 취해 구성한 것이며, 용감한
경기병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암시하는 트럼펫과 호른의 유니즌
에 의해 전주가 나오고, 경기병의 갤럽풍이 이어진다.
차차 빨리 진군하는 기병의 모습이 묘사되고, 곡은 단조로 바뀌어 중간부로 들어간다.
그리고 최초의 행진곡이, 관현악 총주로 힘차게 재현된다.
故 주페는 지휘자 겸 작곡가로서 활동을 시작해, 음악극과 극의 반주음악들을 작곡했었다.
그러다 1,846年의 그는, 안 데아 빈극장으로 영입돼 ‘ 시인과 농부 ’ 를 발표했었다.
1,858年의 그는, 故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 1,819 ~ 1,880 ·
독일의 쾰른)의 오페레타인 ‘ 제등(提燈)결혼 · 천국과 지옥 ’ 등에 자극을
받곤 오페레타에 뜻을 세워 1860년에 ‘ 기숙학교 ’ 을 작곡했었다.
그의 오페레타는, 이탈리아의 밝고 · 푸른 하늘처럼 명랑한 가락을 가진 노래에, 빈의 달콤함
과 섬세함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故 오펜바흐로부터 배운 파리풍의 경쾌함과 멋
진 줄거리의 구성이 모든 사람에게 쉽게 친숙해질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는, 약 200편의 음악극을 작곡해 빈 오페레타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故 쥬페는, 세계 3대 서곡 中 2곡을 작곡했었다.
즉 그의 ‘ 경기병의 서곡 ’ 과 ‘ 시인과 농부의 서곡 ’ 이며, 나머
지 하나는 故 오펜바흐의 ‘ 천국과 지옥의 서곡 ’ 이다.
Operetta(희가곡)는, 작은 오페라 라고 불리기도 하며, 오페라보다는 규모가 작은
‘ 희가곡 ’ 으로 대중을 위한 오페라이고, 오늘날 ‘ 뮤직컬의 모태 ’ 가 됐었다.
서곡(Overture)이란, 오페라나 발레의 막이 오르기 전의 빵빠레 정도였으나, 작품의 줄거리나 분
위기 때로는 작품의 모음곡 성격에서 독립된 형식을 갖추어 발전하고 또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면서, 이태리 풍의 서곡은 ‘ 신포니아(Sinfonia) ’ 라고 하며, 고전파 시대에
이르러서는 독립된 악곡으로 진화해 ‘ 교향곡 ’ 이 탄생하게 됐었다고 한다.
경기병은, 중무장을 한 중기병과 반대 개념으로 가볍게 무장하
고, 역시 가벼운 갑옷을 걸친 말을 탄 기병을 의미한다.
보통 정찰이나 상대 진영의 습격, 연락망 등 민첩하게 움직여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기동성이 좋아야 한다.
경기병은, 원래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매우 드물게 사용됐으나, 유목민
족이 많은 중아시아에서는 군대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앙드레 류
그는, 네덜란드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이다.
그는, 클래식과 대중 음악을 넘나드는 레퍼토리와 공
연 · 앨범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었다.
조국을 빛낸 앙드레 류는 1,949年, 네델란드의 마스트리트(Maastricht)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었다.
마스트리트(Maastricht)는, 네델란드 동남쪽 끝에 위치한 유럽에서
가장 中世적인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인구 약 12만명의 평
화로운 작은 도시이며 Mass江이 시내를 흐르고 있다.
이 곳은 1,991年 EU(유럽연합)을 잉태시킨, 마사트리트 조약(
Maastricht Treaty)이 조인된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그는 이웃나라인, 벨기에(Belgium)의 브뤼셀(Brussels)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지휘를 공부하고, 살롱에서 아르바이트로 대중음
악을 연주하다가 왈츠(Waltz)의 매력에 빠져들었었다.
학교에서, 클래식 음악의 엄격한 표현 형식에 숨이 막혔던
그에게, Waltz와 대중음악은 새로운 세계였었다.
화려한 현악 앙상블과, 코러스를 동원한 격조 높고 세련된 그의 음악은, 멜
로디를 잃어버린 클래식 음악과 Pop 음악에 대해 저항감을 느낀
음악 팬들을 사로잡으면서, 크로스오버(Cross-over) 음
악의 다양성에 대한 희망을 제공하는 거였었다.
이러한 앙드레 류의 젊은 통찰은, 연주 스타일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었다.
클래식 음악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그는 특유의 감미롭고 · 마술적인 音
의 세계로 콘서트 홀(Concert Hall)을 언제나 청중과 연주자
가 하나가 되어 감동과 자유분방함으로 넘치게 만든다.
바로, 크로스오버 음악의 시작이었었다.
그는, 음악도 시절부터 세계 모든 음악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런던 애비 로드(Ab
bey Road)에 있는 로열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을 동경했는
데, 검증된 세계적 연주자가 아니면 무대에 설수 없는 곳이다.
결국 어느 날 그는, 이 곳에 입성해 연주의 꿈을 이루며 까다
롭기로 소문난 영국 음악 청중들의 갈채를 받았었다.
그에게는, 무명시절 이런 일화(逸話)가 있다.
즉 그는 1,984年初, 세계 최대의 필립스(Philips) 레코드 社의 본사를 방문했었다 한다.
연주 부장에게, 앙드레 류는 자기가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라고 소개한 뒤 ‘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 ’ 를 결
성했으니, 음반을 내고 싶다고 했었다 한다.
수수한 차림에 키 큰 미남이긴 했지만, 검증이 안된 젊은 음악가
를 알아줄 리 없어, 그는 한 마디로 거절당했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진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그는, 또 다른 세계적 음반회사인
담당 매니저가, 이 당돌한 젊은이의 설명을 듣곤 테스트를 해 보기로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과는, 단 번에 합격이었었다.
일생동안 그 어느 누구에게나, 한 두 번의 획기적 전환점이 있다고 한다.
해서, 그에게도 행운은 찾아 온 거였었다.
머큐리(Mercury)의 이름으로 출간한, 요한 스트라우스의 Waltz집인 ‘ 슈트라우스(St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