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스메타나(Smetana) - 피아노 3중주 사단조, 작품번호 15
故 Bedřich Smetana - Piano Trio In G Minor, Op 15
연주 : 에벤 삼중주단(Eben Trio)
작곡가, 故 스메타나
이 곡은, 故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řich Smetana · 1,824 ~ 1,884 · 보헤미아의 리
토미슐)의 유일한 피아노 트리오 곡으로, 4악장이 아닌 3악장으로 구성돼 있다.
故 스메타나는, 체코의 가장 유명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었었다.
그의 대표작으론, 교향시인 ‘ 나의 조국 ’ 과 오페라인 ‘ 리누세 · <팔려간 신부 ’ 가 있다.
故 스메타나는, 보헤미아 왕국 북부의 리토미슐에서 1남 17녀 中 외동아들로 태어났었다.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맥주 양조 기사였던 그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 그는 일찍이 프라하에 나가 故 프록시에게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배웠었다.
그러나 그는 4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6세 때 피아노를 연주해 신동이란 말을 들었었다.
19세 때의 그는, 프라하로 가 부잣집의 음악선생을 하며 · 음악 공부도 하던 중, 그 때 프라
하를 방문했던 故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곤 감동해, 그와 친분을 맺기도 했었다.
故 스메타나는, 당초 피아노 연주자가 될 것을 꿈꾸었으나,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민중 사이에 저항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1,848年 오스트리아 2月 혁명의 여파로, 프라하에도 6月에 혁명운동이 일어나자 민
족의식에 눈뜬 그는, 국민의용군에 가담하여 국민의용국 행진곡 등을 작곡
했으며, 민족운동에서의 작곡가의 역할을 새삼 자각하게 됐었다.
이 시절의 그는, 故 리스트의 도움을 받아 프라하에
음악 학교를 세우고, 후배를 양성했었다.
헌데 그의 작품은, 과도한 민족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서정적인
면이 짙었으며, 보헤미안 민족음악의 시조로 불린다.
그러나 혁명 실패 이후의 반동정치에서는, 자유로운 음악활동이 억압됐기 때문에,
그는 친구의 권유로 1,856年 스웨덴으로 건너가 5年간 예테보리에서 음
악학교를 개설했으며, 괴텐보르크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됐었다.
또 그는, 바이마르에서 故 리스트와 재회해 교향시 3편을
쓰는 등 작곡가 ·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1,860年代의 그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탄압이 느슨해지자 체코슬
로바키아 민족운동이 되살아나자마자 귀국해, 민족운동의 선두에
서서 지휘자 · 작곡가 · 평론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유럽을 순회하며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했었다.
1,852年, 체코슬로바키아 국민극장의 전신인 가극장(假劇場)이 프라하에 건립되자,
이 극장을 위해 작곡한 오페라인 ‘ 팔려간 신부 ’ 를 상연해 큰 성공을 거둔 후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음악의 기초를 확립한 그는, 그 해 가을에는 이 가
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돼 여러 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을 음악을 통해 호소했었다.
그러다 1,874年의 그는, 50세의 한창 나이에 매독으로 인한 숙
환인 환청(幻聽)이 악화돼 극장 지휘자를 그만뒀었다.
10月에는 귀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국에 대한 깊은 사
랑을 나타낸 교향시인 ‘ 나의조국 ’ 中 ‘ 블타바(몰다우) ’ 를 작곡했었다.
그리고 그 후의 그는, 모든 공적 활동을 중지하곤 프라하 교외에 은퇴했었다.
그러나 1,883年 말부터의 그는, 정신착란 증세까지 나타났으
며, 그는 1,884年 프라하의 정신병원에서 사망했었다.
故 스메타나, 피아노 3중주
故 스메타나는 ‘ 나의 조국 ’ 등으로, 체코 민족음악의 불을 댕긴 작곡가
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는 독일의 낭만음악에 대해 정통했었다.
이건, 故 베토벤과 故 슈만의 영향이 강한 ‘ 피아노 삼중주 ’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곡은 1,854年에, 그의 딸인 故 베드시카(Bediska)가 네 살에 고열로 세
상을 떠난 슬픔속에 작곡돼, 그의 예술가적 감수성 또한 깊게 배어 있다.
그의 딸은, 비록 네살밖에 되진 않았지만, 그는 음악적인 재능을 알아봤었다고 한다.
해서, 그의 가슴은 더욱 찢어졌을 것이다.
해서 故 베드시카가 죽은지 80여일 만에 쓴 이 곡은 … ,
그래서 더욱 슬프지만 ·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1,855年에 초연이 됐지만, 좋은 평을 얻진 못해
10年이 넘은 1,879年에야 겨우 출판됐었다.
초연은 1,855年 11月 3日, 프라하 신학교 강당의 저녁에 실내악 콘서트장에서,
故 스메타나가 피아노 앞에 앉았고, 故 오토 쾨니히슬뢰프(Otto Konigs
low)가 바이올린을 연주했으며, 음악원의 교수였던 故 율리우스
골터만(Julius Goltermann)이 첼로를 연주했었다 한다.
그러나 초연 땐 별다른 호평을 얻어내지 못했지만, 그 이듬해에 프라하를 방
문했던 故 리스트한테 들려줬을 땐 큰 칭찬을 받았었다고 한다.
이 곡의 제 1악장은, 강하고 · 어두운 주제로 바이올린이 시작을 하고, 잠시 밝
은 분위기로 가나 싶지만 … , 다시 또 비극적인 선율로 끝을 맺는다.
마치 죽은 딸을 회상하다, 현실로 돌아온 아픔을 표현한 듯하다.
그는, 20대에도 실내악곡에 관심을 가졌지만 습작 뿐이었고, 31세가 되어서야 그
의 첫 실내악곡인 바로 이 ‘ 피아노 3중주 G단조 Op 15 ’ 가 나왔었다.
이 곡은, 그의 유일한 피아노 3중주이며, 모든 피아노
3중주 곡의 걸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제 1 악장 : Moderato assai · Più animato
제 2 악장 : Allegro · ma non agitato
제 3 악장 : Finale · Presto
연주, 스메타나 피아노 3중주 - 스메타나 트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