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멘델스존(Mendelssohn) -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의 서곡
故 Mendelssohn - Overture, Meeresstille und glückliche Fahrt · Op 27
지휘, 故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 1,933 ~ 2,014)
故 멘델스존,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의 서곡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유럽 인문주의를 선도한 대문호였던 ‘ 故 요한 볼프강 폰 괴
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1,749 ~ 1,832 · 독일) ’ 는, 문학은
물론 거의 모든 학문의 영역에 탁월성을 발휘한 당대의 천재였었다.
특히 그가 지은 수많은 시들은, 故 슈베르트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들에 의해 명곡들로 탄생됐었다.
그의, 서사시인 ‘ 고요한 바다와 행복한 항해 · Meerstille und Gluckliche Fahrt
’ 는 1,795年에 창작한 것으로, 무사한 바다 항해를 기리는 내용으로 돼 있다.
헌데 이 시를 바탕으로, 故 멘델스존이 연주회용 서곡을 지었었다.
이 곡은 비교적 짧고 · 형식도 간단하지만, 극적이고 · 웅장하다.
아니 故 멘델스존의 온화함과, 쾌활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평생동안 타인에게 붙임성이 있었고, 자연과 예술을 사랑
했던 그의 해맑은 미소가 이 작품에 투영돼 있다.
바순과 클라리넷, 호른과 오보 등이 동원돼 뱃고동 소리를 알리고, 연이
어 관현악의 다채로운 혼합음들이 배를 힘차게 항진시킨다.
뱃전에 부딪치는 물결은 현의 반복음이, 뱃사람들의 즐
거운 휘파람 소리는 목관의 화음이 표현한다.
아니 故 멘델스존 본인의 곡인, 교향곡 ‘ 이탈리아 ’ 의 분위기 혹
은 ‘ 한여름 밤의 꿈 ’ 의 스케르쪼 악장과 사뭇 비슷하다.
이 곡은 변화감 있고, 다이내믹하게 고조돼 팀파니와 관현악의 팡파
레가 울리면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후, 장엄하게 종결된다.
이 곡은 비록 소품에 불과하지만, 전반부에서는 듣는 이의 심기를 편
안하게 하고, 후반부에서는 용기와 자신감을 얻게 만든다.
삶에 지치거나 · 새로운 활력을 모색하는 이에겐, 기분전환
용으로 곁에 두고 감상하기엔 합당한 명곡이다.
故 멘델스존이 이 시로 작곡하기 30여年 전에, 악성인 故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 1,770 ~ 1,827 · 독일)이 먼저 故 괴테의
시를 토대로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 칸타타 ’ 를 작곡한 바 있다.
그의 나이, 마흔 다섯 살 때인 1,815年이었었다.
故 베토벤의 칸타타 역시 대가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는 걸작으로, 故 괴테의 시
가 성악에 의해 불려지고 있어서 그 감동의 뉘앙스가 다르게 전해진다.
故 멘델스존과 故 베토벤은, 시대를 달리하는 작곡가였었지만 여러 공통점들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독일권에서 작곡가들로 명성을 드높였지만 국외
자(局外者)들의 처지에서 불우한 초년시절을 겪었었다.
故 베토벤은 네덜란드 혈통, 故 멘델스존은 유대인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고전주의 형식에 충실한 작곡법을 구사했었다.
작곡가, 故 멘델스존
지휘자로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했던, 故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 1,809 ~
1,848 · 독일)은 1,829年 3月 11日 베를린 징아카데미(Singa kademie)에서 故
바흐가 죽은 뒤 처음으로 ‘ 마태 수난곡(St. Matthew Passion)을 초연 ·
지휘해, 19 ~ 20세기 故 바흐 부흥운동의 계기를 마련했었다.
그 사이 그는 스위스를 방문해, 故 카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 1,786 ~
1,826 · 독일)를 만났으며 1,821年 베를린에서 공연된 故 베버의 오페라인 ‘ 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 ’ 에 자극을 받아, 민족적 성향의 작곡에 고무됐었다.
이 시기 그의 최고 작품은 현악 8중주(1,825)로, 완벽한 기교와 거의 유례를 찾아 보
기 힘든 가벼운 터치가 돋보일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서 발전시킨 경쾌한 스
케르초 악장은 ‘ 한여름 밤의 꿈 ’ 의 부수음악에서도 나타났었다.
1,829年의 봄, 그는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와 교향곡 C단조를 지휘하기
위해 처음으로 영국 여행을 떠났고, 여름에는 스코틀랜드로 갔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그는, 여러 차례 시적인 느낌들을 편지에 담아 ‘ 그 곳에
는, 흥겨운 민요 가락이 있고 · 귀는 사랑스럽고 · 향기로운 시골길
로, 마음은 원주민의 맨종아리로 향해 있다 ’ 라고 적었었다.
그리고 매력적이고 · 우아한 작품들로 그는, 점차 19세기의 가장 인기 있는 작곡가가 돼 갔었다.
물론 그는 영국에서도 명성이 높아, 그의 짧은 생애 동안 영국을 적어도 10번 이상 방문했었다.
영국에서의 그의 음악은, 빅토리아적이라고 평가됐었고, 실제로 故 빅
토리아 여왕은 작곡가 中 故 멘델스존을 가장 좋아하게 됐었다.
그러다 1,835年의 故 멘델스존은, 그의 아버지인 故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상심해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최대 소망은, 그의 아들이 ‘ 성 바울로 ’ 를 완성하는 것이었고, 그는 이제
새로운 각오로 이 작업에 뛰어들어 이듬해 뒤셀도르프에서 이 곡을 지휘했었다.
같은 해의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랑스 개신교 목사의 딸인 故 세실 장르노를 만났었다.
그녀는 16세로 故 멘델스존보다 10세나 어렸지만, 이 둘은
약혼에 이어 1,837年 3月 28日 결혼식을 올렸었다.
기록 중에서, 故 멘델스존과 가장 가까웠던 그의 누이인 故 파니는,
동생의 아내에 대해 ‘ 그녀는, 귀엽고 · 순진하고 · 신선하며
· 영리하고 · 좋은 성격을 가졌다 ’ 라고 씌어져 있다.
악단, 코네티컷 페스티벌 합창단과 관현악단(University of Connecticut Festival Chorus and Orchestra)
故 베토벤 작곡,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칸타타 · 작품번호 112 · 고요한 바다와 행복한 항해
지휘, 콘스탄체 데 포티스(Constance De Fot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