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故 오펜바흐
故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 1,819 ~ 1,880)는, 독일의 쾰른에서 태어났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교 회당의 칸토르이자 카페의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아들이 음
악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곤, 아들을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갔었다.
목표는,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는 거였었다.
하지만 당시 원장이던, 故 케루비니(Luigi Cherubini · 1,760 ~ 1,842 · 이탈리
아 태생의 프랑스 작곡가)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을 불허했었다.
그러자 故 오펜바흐의 아버지는, 오디션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애원했고, 故 케루비니는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었다.
헌데 바로 이 오디션에서, 당시 14살이던 故 오펜바흐는
놀라운 첼로 솜씨로 故 케루비니를 감동시켰었다.
이렇게 어렵게 음악원에 들어갔지만, 故 오펜바흐는 학
교의 아카데믹한 풍토에 적응하진 못했었다.
싫증을 느낀 그는, 입학 일 년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었다.
그 후의 그는, 임시직을 전전하다가 1,835年에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인 ‘ 코미크 ’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가 됐었다.
그 후 故 오펜바흐는, 자비를 들여 故 노르블랭에게 첼로를,
故 알레비에게 작곡법과 오케스트레이션을 배웠었다.
이때 故 알레비는, 故 오펜바흐의 아버지에게 ‘ 당신 아들은, 나중에
위대한 작곡가가 될 것이다 ’ 라는 편지를 보냈었다고 한다.
이 무렵에 그는, 자신의 전공인 첼로를 위한 곡을 많이 작곡했었다.
작곡가로서의 故 오펜바흐의 최종 목표는, 오페라를 작곡하는 거였었다.
하지만 연줄도 없고, 학벌도 없는 외국인이 파리 오
페라계에 진출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해서 그는, 우선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첼리스트로서,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연주회를 가졌었다.
프랑스는 물론 멀리 독일과 영국까지 진출했는데, 가는 곳마다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다.
연주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 전까지 그는 작곡을 하는 첼리스트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 무렵부터는
자신의 정체성을 첼로를 연주하는 작곡가로 바꾸고자 노력했었다.
헌데 1,850年, 평소에 故 오펜바흐의 재능을 눈여겨 본 코미디
프랑세스 극장의 감독이 그를 음악감독으로 임명했었다.
그의 임무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을 위한 노래나 부수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그가 오페라를 작곡하는데 큰 도움이 됐었다.
또한 故 오펜바흐가 연극을 위해 작곡한 음악은, 사람들에게 널리
인기를 끌었고, 더불어 극장의 흥행에도 큰 도움이 됐었다.
하지만 파리의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인, 오페라 코미크에서
는 여전히 그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하진 않았었다.
해서 오페라 코미크로부터 위촉이 오기를 기다리던, 故 오펜바흐는 결국 기대를 접었었다.
그리고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살레 라카즈를 빌려 부프 파리지앵이라는 극장을 열었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절묘했었다.
1,855年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는데, 박람회장 바로 옆에 그의 극장이 있었다.
거리는 박람회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붐볐고, 그 덕분에 극장도 연일 성황을 이뤘었다.
해서 故 오펜바흐는, 작곡 · 감독 · 지휘 · 연출까지 일인다역을 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했었다.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그의 극장은, 객석이 300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극장이었다.
해서 그는, 작은 규모의 곡을 써야만 했었다.
그러다가 점점 인기를 끌면서, 나중엔 부프 파리지앵은 슈
아죌 가에 있는 보다 큰 극장으로 옮겨 갔었다.
그 어쨌든, 이 작은 극장을 위해 故 오펜바흐는 24年 동안 21편의 오페라를 썼었다.
첼로, 베르너 토마스 미푸네
피아노, 세르지오 다니엘 티엠포(Sergio Daniel Tiempo · 1,972 ~ 베네수엘라 · 남성)
첼로, 장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