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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오펜바흐(Offenbach) - 자클린의 눈물, 작품번호 76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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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l3659\0\0 2019. 9. 24.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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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펜바흐(Offenbach) - 자클린의 눈물, 작품번호 76 - 2

Jacques Offenbach - Les Larmes du Jacqueline, Op 76 - 2

첼리스트, 장한나(Han na Chang · 대한민국의 수원)




故 오펜바흐, 자클린의 눈물


바로 이 ‘ 자클린의 눈물 ’ 은, 캉캉 음악으로 익숙한 故 자크 오펜바흐
(Jacques Offenbach · 1,819 ~ 1,880 · 독일)의 작품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 자클린의 눈물 ’ 은 故 오펜바흐 자신이 붙인 제목은 아니다.
첼리스트인인 베르너 토마스 미푸네(Werner Thomas Mifune · 1,941
), 故 오펜바흐의 유작 중 미발표된 이 곡을 발견하곤, 요절
천재 첼트였던 자클린 뒤 프레(Jacqueline Mary
Du Pre · 1,945  ~ 1,987)의 비운했던 삶을 추모
기 위해 이 제목을 붙여 발표했던 곡이다.

이 ‘ 자클린의 눈물 ’ 의 애절한 선율 뒤에는, 그녀의 영화같은 일대기의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영국 태생이었던 故 자클린 뒤 프레는, 5살 때부터 런던 첼로 학교에 입학한 천재적
을 보여, 16세 때 영국에서 데뷔한 이후 ‘ 우아한 영국장미 ’ 라는 애칭
리며그녀는 영국 음악계의 자존심이자 상징 그 자체였었다.

그러다 그녀는 23세 때에, 탁월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Da
niel Barenboim · 1,942 ~ )과 결혼해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치던 중
27세 때에 ‘ 다발성 경화증 ’ 이란 희귀병 판정을 받게 됐었다.

‘ 다발성경과증 ’ 이란, 점차 시력이 소실돼 시력을 잃게 되는 경우도 
으며, 감각 또한 느끼지 못한 채 마비가 오는 증상이라고 한다.
헌데 이러한 증상들은 첼리스트에겐 치명적이라, 故 자클린은
28세 때에 모든 연주 활동을 중단했었다고 한다.

해서 그 이후의 그녀는, 음악 · 남편과 결별한 채 ‘ 박제가 된 천재 ’ 로 15간이나
 고독한 투병생활을 한 끝에, 결국 42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었다고 한다.

헌데 그녀는, 다발성 경화증으로 팔 · 다리도 움직이지 못했고사물이
개로 보여 책을 읽지도 못했고 · 돌아 눕지도 못했고,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았었다고 한다.

헌데 앞선 시대의 작곡가였던 故 오펜바흐는천재 첼리스트였던 故 자클린이
래에 살아갈 비운의 삶을 예감이라도 한 듯, 바로 이 ‘ 자클린의 눈
’ 의 선율 하나 하나에 故 자클린의 한과 절망을 형상화했었다.

그러나 무작정 슬퍼하기보다는, 빠른 템포와 상승하는 선율
통해 슬픔 이후 재생에의 갈망 또한 담겨 있다.

꿈도 · 음악도 · 사랑도 · 인생도, 그 모든 것들을 다 상실한 故 자클린, 해서 실컷 
보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울 수 조차도 없었던 그녀의 아픈 삶이었지만,
이 곡인 ‘ 자클린의 눈물 ’ 에선 그녀를 대신해 울어주며 · 절규한다.

즉 故 자클린 드 프레의 음악과 · 재능을 사랑해, 그녀에게 이 곡을 헌정한 후배 첼리스
트인 베르너 토마스 미푸네에 의해이 곡을 연주하는 모든 연주가들해 그
이 곡을 감상하고 · 사랑하는 많은 음악애호가들에 의해, 故 자클
린 드 프레의 운명적 삶과 · 음악은 재생하고 · 부활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 곡과 함께 음악사에서 영원히 불멸하게 된다.

작곡가, 故 오펜바흐

故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 1,819 ~ 1,880)는, 독일의 쾰른에서 태어났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교 회당의 칸토르이자 카페의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아들이
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곤아들을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갔었다.
목표는,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는 거였었다.

하지만 당시 원장이던, 故 케루비니(Luigi Cherubini · 1,760 ~ 1,842 · 이탈
아 태생의 프랑스 작곡가)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을 불허했었다.
그러자 故 오펜바흐의 아버지는, 오디션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애원했고, 故 케루비니는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었다.

헌데 바로 이 오디션에서, 당시 14살이던 故 오펜바흐는
라운 첼로 솜씨로 故 케루비니를 감동시켰었다.

이렇게 어렵게 음악원에 들어갔지만, 故 오펜바흐는 학
의 아카데믹한 풍토에 적응하진 못했었다.
싫증을 느낀 그는, 입학 일 년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었다.
그 후의 그는, 임시직을 전전하다가 1,835에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인 ‘ 코미크 ’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가 됐었다.

그 후 故 오펜바흐는, 자비를 들여 故 노르블랭에게 첼로를,
알레비에게 작곡법과 오케스트레이션을 배웠었다.
이때 故 알레비는, 故 오펜바흐의 아버지에게 ‘ 당신 아들은, 나중에
위대한 작곡가가 될 것이다 ’ 라는 편지를 보냈었다고 한다.
이 무렵에 그는, 자신의 전공인 첼로를 위한 곡을 많이 작곡했었다.

작곡가로서의 故 오펜바흐의 최종 목표는, 오페라를 작곡하는 거였었다.
하지만 연줄도 없고, 학벌도 없는 외국인이 파리
라계에 진출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해서 그는, 우선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첼리스트로서,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연주회를 가졌었다.
프랑스는 물론 멀리 독일과 영국까지 진출했는데, 가는 곳마다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다.
연주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 전까지 그는 작곡을 하는 첼리스트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 무렵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첼로를 연주하는 작곡가로 바꾸고자 노력했었다.

헌데 1,850, 평소에 故 오펜바흐의 재능을 눈여겨 본 코미디
프랑세스 극장의 감독이 그를 음악감독으로 임명했었다.

그의 임무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을 위한 노래나 부수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는데, 이것이 나중에 그가 오페라를 작곡하는데 큰 도움이 됐었다.
또한 故 오펜바흐가 연극을 위해 작곡한 음악은, 사람들에게 널리
인기를 끌었, 더불어 극장의 흥행에도 큰 도움이 됐었다.

하지만 파리의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인, 오페라 코미크에서
여전히 그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하진 않았었다.

해서 오페라 코미크로부터 위촉이 오기를 기다리던, 故 오펜바흐는 결국 기대를 접었었다.
그리고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살레 라카즈를 빌려 부프 파리지앵이라는 극장을 열었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절묘했었다.

1,855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는데, 박람회장 바로 옆에 그의 극장이 있었다.
거리는 박람회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붐볐고, 그 덕분에 극장도 연일 성황을 이뤘었다.
해서 故 오펜바흐는, 작곡 · 감독 · 지휘 · 연출까지 일인다역을 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했었다.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그의 극장은, 객석이 300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극장이었다.
해서 그는, 작은 규모의 곡을 써야만 했었다.
그러다가 점점 인기를 끌면서, 나중엔 부프 파리지앵은
아죌 가에 있는 보다 큰 극장으로 옮겨 갔었다.
그 어쨌든, 이 작은 극장을 위해 故 오펜바흐는 24 동안 21편의 오페라를 썼었다.




첼로, 베르너 토마스 미푸네


피아노, 세르지오 다니엘 티엠포(Sergio Daniel Tiempo · 1,972 ~ 베네수엘라 · 남성)

첼로, 장한나 


첼로, 장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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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故 오펜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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