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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모짜르트 - 진혼곡 中 제 3곡 라단조, 눈물의 날 · 작품번호 626

Classic Music

by tl3659\0\0 2019. 6. 27.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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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모짜르트 - 진혼곡 中 제 3곡 라단조, 눈물의 날 · 작품번호 626

Mozart - Requiem in D Minor K 626, 3 Sequentia · Lacrimosa

지휘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故 모짜르트, 눈물의 날


이 곡은, 故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름다운 서정성이 돋보이며, 진혼곡의 애통함이 정점을 이루는 곡이다.


이 곡은, 긴장된 故 모짜르트의 창조적 생명의 등불이 마지

으로 타오르는 것을 애달프게 보여주는 듯하다.


이 곡은, 악장의 끝에 등장하는 ‘ 레퀴엠의 주제 ’ 가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도 감동적이다.

그리고 이 곡은, 장대한 세쿠엔치아의 최후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 아멘 ’

위해 故 모짜르트는 거대한 푸가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레퀴엠(Requiem)이란?


레퀴엠이란죽은 사람의 안식을 기원하는 가톨릭 미사곡으로 진혼곡이라 할 수 있는

, 이 진혼미사 전례의 첫 머리 입당송이 라틴어로 ‘ Requiem aeternam

donaeis, Domine(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로 시작

문에, 레퀴엠 미사 또는 레퀴엠(진혼곡)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첫 단어만 따, 레퀴엠 미사 또는 그냥 레퀴엠이라는 명칭으로

사를 대신해 불렀고, 이것이 점차 종교적 의식이란 의미에서

, 나의 독립된 음악장르로서 ‘ 진혼곡 ’ 이라고 뜻하게 됐었다.


故 모짜르트의 레퀴엠은, 미완성이라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레퀴엠 역사상 최고의 걸작

평가받는 동시에 가장 자주 연주되고 또한 대중적인 인기도 높은 곡이다.


故 모짜르트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이 레퀴엠을 쓰기 시작한 것은

1,7917느 날 검은 옷을 입은 정체 불명의 이상한 풍채

한 남자로부터 그 작곡을 의뢰받으면서부터였었다.


오랫동안 생활의 어려움을 겪어온 故 모짜르트는, 심신의 피

당장 작곡을 시작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으,

성할 날짜를 정하지 않는 조건으로 승낙했었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작곡료는 충분히 주겠으니 의뢰인이 누

알려고 하지 말라는 단서를 붙이곤 돌아갔었다.


해서 건강이 악화된 故 모짜르트는, 이 곡을 자신의 죽음

위하여 작곡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됐었다.

1,791年 11 20, 故 모짜르트의 병은 급격하게 악화돼 자리에 눕고 말았었다.

그러나 그는, 괴로움 속에서도 생명의 전부를 이 곡에 쏟아넣어 작곡을 계속했었다.


1,79112 4, 모짜르트는 그의 애제자였던 故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

yr · 1,766 ~ 1,803)불러 작곡하다 중단된 바로 이 곡인 3 6부의 눈물겨

, 이 오면(Lacrimosa) ’ 을 어떻게 완결할 것인가를 지하곤그 다음

5日  오전 0 55분에 36세의 나이로 영원히 잠들고 말았었다.


그리하여 끝내 완성하지 못한 ‘ 백조의 노래, 레퀴엠 ’ 은, 성악 부분은 42

‘ 제물과 기구 ’ 곡 역시 54마디까지 완성됐었고, 바로 이 곡인 ‘ 눈물

, 그 날이 오면 ’ 이 곡 또한 8마디에서 중단돼 있었다고 한다.


관현악 부분은, 단지 처음인 ‘ 입당송 ’ 과 ‘ 자비의 찬가 ’ 만 완성돼

었을 뿐이고, 나머지는 부분적으로 작곡돼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전체의 2/3 정도밖에 완성되지 못한 레퀴엠을 故 쥐스마이어는

유언에 따라 故 모짜르트의 악상을 더듬어, 그의 기법을 그

용해 故 모짜르트가 죽은 2개월 후에 완성했었다 한다.


해서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 쥐스마이어판 ’ 으로 알려진, 故 모짜르트의 레퀴엠인 것이다.

그러나 스승과 같은 신적인 영감을 갖고 있지 못했던 故 쥐스마이어는, 故 모짜르트가 미

술하지 못한 부분들을 작곡하면서 그 미숙함을 드러내었고, 곡의 마무리인 7

부에서는 1부인 ‘ 인트로이투스(입당송) ’ 와 제 2부인 ‘ 키리에 ’ 에서

몇 부분을 발췌해, 이어 붙이는 미봉책으로 곡을 끝맺고 말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이 유작곡인 ‘ 레퀴엠 ’ 은 故 발제크 슈트파크(Franz von Walse

gg · 1,763 ~ 1,827) 백작에게 넘겨져, 그의 이름으로 발표됐었다고 한다.


헌데 레퀴엠을 둘러싼 故 모짜르트의 전설은, 故 발제크 슈트파

크라는 백작이 심부름꾼을 시켜 故 모짜르트에게 이 ‘ 레

엠 ’ 의 작곡을 의뢰한데서 비롯됐었다고 한다.


그는, 남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처럼 발표하기를 즐겼던 인물로, 故 모짜르트에게 ‘ 레

퀴엠 ’ 을 부탁해, 그 곡을 먼저 죽은 자신의 부인을 위해 만든 곡으로 발

, 심부름꾼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보냈을 것이란 추측이다.


지휘자,클라우디오 아바도


그는, 20세기 오스트리아와 영국 등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 태생의 지휘자였었다.

그는 1,971 ~ 1,991,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로 일했으

며 1,986 ~ 1,991,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역임했었다.


또한 1,979 ~ 1,988 그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

으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있었다.


故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유서 깊은 음악가 가문 출신이며, 그의 아

버지인 故 미켈란젤로 아바도는 바이올린 연주자였었다.

처음에 故 아바도는, 개인적으로 음악을 배웠으나 16세에 주제페

음악원에 입학해 피아노 · 작곡 · 지휘를 공부했었다고 한다.


그 후의 그는, 시에나에 있는 아카데미아 키지아나와 빈 음악원에서 지휘를 전

했으, 빈 음악원에서 지휘자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 사사했었다.

1,958의 故 아바도는, 매사추세츠의 탱글우드 음악제에서 쿠세비츠키 지휘상

을 수상했고 1,963에는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 지휘상을 받았었다.


1,965 그는 알레 오케스트라를 이끌곤, 맨체스터를 방문함으로써 영국 무대에 처음

습을 드러냈고 1,966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긴 유대관계가 시작됐었다.

1,979 그는, 수석 지휘자였던 故 앙드레 프레빈의 후임으로

부임하기 이전에도,악단을 정기적으로 지휘했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라 스칼라와 밀라노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일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오페라 애호가들이 보다 쉽게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 길을 열기도 했었다.

그는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했으며,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시

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는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했었다.


2,000그는, 위암 수술을 받곤 투병생활을 전전하다 기적적으로 회

해 다시 무대에 올라 활동을 시작했고,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

라를 결성해, 세계적으로 뛰어난 연주자들과 협업했었다.

그러다 그는 2,014, 오랜 지병을 이겨내지 못해 결국 귀천했었다. 




지휘,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 1,933 ~ 2,014)

연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ker)


지휘, 헤르베르트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 1,908 ~ 1,989)

연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Wiener Philharmoni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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