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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프란시스코 타레가(F. Tarrega) -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 Guitar 연주

Classic Music

by tl3659\0\0 2019. 6. 19.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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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프란시스코 타레가(F. Tarrega-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故 Francisco Tarrega - Recuerdos de la Alhambra

기타 연주 : 줄리안 브림(Julian Bream)

부제 : 기도




알람브라 궁전


알람브라 궁전은, 스페인의 남부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를

바라보는 구릉 위에 세운 주위 3.5 km의 이슬람 시대의 성

(城堡) 가운데 130 × 182 Km의 좁은 부지에 세워졌었다.


알람브라 궁전은, 에스파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의 무하마드 1

故 알 갈리브가 13세기 후반에 창립하기 시작해 역대의 증축과 개수

거쳐 완성됐으며, 현재 이 궁전의 부분은 14세기 때의 것이다.


알람브라 궁전은, 대리석 · 타일 · 채색 옻칠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장식의

2개의 커다란 파티오(중정 · 中庭)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유수프 1세(재위 1331 ~ 59)가 건조한 것인데, 미루트( · )의 파티오 1곽으로

사각형의 연못을 따라 한 쪽은 공식적인 알현 장소인 대사(大使)의 집으로 연결된다.


즉 스페인의 여왕이었던 故 이사벨라는, 그라나다에 있던 이슬람 나스르

를 몰아내고 700 만에 스페인을 통일된 국가로 만들었었다.


카톨릭 교도였던 故 이사벨라 여왕은,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며 콜롬버스

탐험을 후원해 아메리카 대륙의 넓은 땅을 식민지로 삼았었다.

한 때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대서양을 주름잡으며 유럽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했었다.

해서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세력이 물러난 뒤, 한동안

람브라 궁전은 폐허상태로 내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1,832, 미국의 외교관이었던 故 워싱턴 어빙이 무관심속에 방치되다

시피한 알람브라 궁전에 머물면서 ‘ 알람브라 이야기 ’ 란 책을 썼었다.

이 때부터, 알람브라 궁전이 스페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됐었다.

그리고 스페인 정부에 의한, 알람브라 궁전 복원사업이 추진됐었다.


알람브라 궁전은, 이슬람 양식으로 지어진 절제된 아름다움과 카톨릭 문화속의

이슬람 문화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었다.

허나 이젠, 한 때 알람브라 궁전의 주인이었던 이슬람 왕조가 누렸던 무소불위
권력도 덧없이 사라져버려, 주인없는 궁전만이 남아서 지난 날의 
했던 영광의 자취를 더듬으며 추억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대 기타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스페인 출신의 故 프란시
타레가가 ‘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 을 작곡해, 기타의 선율이
절함을 자아내 듣는 이의 심금을 더욱 더 울릴 뿐이다.

기타 연주가, 프란시스코 타레가

스페인의 기타 연주자이자 이 곡의 작곡자인, 故 프란시스코 타레가(Francisco Tarre
ga · 1,852 ~ 1,909)는, 카스티용 근교 출생으로 근대 기타 연주법의 창
로 일컬어질 만큼 뛰어난 음악성을 보였으나 1,906年 하기 3
오른팔이 마, 을 계속하지 못하
자 이를 며 슬픈 말년을 보냈었다고 한다.

작곡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비롯한
침의 노래 ’ 등 많은 기타 독주곡과 연습곡 등을 남겼었다.

또한 故 J.S. 바흐와 故 베토벤 등의, 고전기타용으로 편곡한 공적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故 타레가는, 제자의 부인이었던 ‘ 故 콘차로 ’ 와의 사랑이 이뤄지질 ,
의 아픔을 안은 채 여행을 하던 중에 알람브라 궁전을 찾게 됐었다고 한다.

헌데 그는, 창 밖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우수에,
명곡인 노래를 지었었다고 한다.

기타 연주가, 줄리안 브림

줄리안 브림(Julian Bream)은 1,933 7 15런던 태생의 기타리스트이다.
특히, 르네상스시대 류트 음악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온 그는,
타와 류트의 양면에 걸쳐 대가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어려서는, 그의 상업 미술가이자 · 아마추어 재즈 기타리스트인 아버지에게 배웠
11세 때부턴 러시아의 기타리스트였던 故 알렉시스 나코
을 받기 시작해, 12세 때에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최하는 연주 무대에 참가할 정도로 기량이 향상됐었다.

그 뒤의 그는, 기타리스트 협회장이었던 故 페롯에게 러시
겸 이탈리아식 기타 연주법을 사사받게 됐었다.

1,947, 故 세고비아는 런던 공연을 위해 영국에 와 있었고, 브림은 故 페롯의 소개로 당대
스페인 최고의 기타 연주자였던 故 세고비아(Andrés Segovia · 1,893 ~ 1,987)
를 만나게 됐는데, 故 세고비아는 그의 연주를 듣곤 즉석에서 그에게 적극
인 후원을 해 줄 것을 약속했고, 브림에게 레슨을 해 주기도 했었다.

브림의 정식 데뷔는, 故 세고비아를 만난 해인 1,947 영국 첼튼햄에
이루어졌으며, 그의 데뷔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14세였던 브림은 1,948, 영국 왕립음악원에 입학해 기타리스트로
피아노와 기타 작곡을 공부했으나, 당시 기타는 천대받고 있는 악
기였기에, 그는 거의 독학으로 기타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1,950 그는 런던에서 데뷔했는데, 이후 전 영국을 통해 이름이 알려졌.
그 때까지만 해도 클래식 기타의 연주는, 대중적이지
브림의 성공적 데뷔는 충격적인 것이었.

그리고 1,950 데뷔 직후의 브림은, 르네상스 시대의 류트를 공부하기 시작했.
그리하여 그 분야의 권위가 된 그는, 연주회 프로그램에 덜
알려진 옛 음악들을 적지않게 삽입시키곤 했었다.

엘리자베드 시대 음악에 관한, 테너였던 故 피터 피어스(Peter Pears · 1,910 ~ 1,986)와의 공동
연구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바 있는데, 故 버클리(Sir Lennox - Randall Francis - Ber
keley · 1,903 ~ 1,989) · 故 브리튼(Edward - Benjamin Britten · 1,913 ~ 1,
976) · 故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 · 1,926 ~ 2,012·
이클 티페트(Sir Michael - Kemp - Tippett · 1,905 ~ 1,998등 주요
작곡가들이 그 영향을 받아 류트와 성악을 위한 작품을 썼었다.

브림은 1,954, 스위스에서의 연주회를 시발로 유럽전역의 연주여행을 시작했었다.
1,956브림은, 故 에이토르 빌라로부스(Heitor Villa - L
obos · 1,887 ~ 1,959)를 만나는데, 이를 계기로 그
타 협주곡을 영국에서 처음 연주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1,958 이후 브림의 시야는, 미국 뿐만
아니라 극동 지역까지 크게 넓혀졌었다.  







Guitar, 그린링거(Jim Greeninger)


Guitar, 줄리안 브림(Julian B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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