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모짜르트 - 피아노 협주곡 24번 C 단조 K 491
피아노 : 故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
故 Wolfgang Amadeus Mozart
피아노의 성녀, 故 클라라 하스킬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었다.
그리고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유태인이었던 그녀
는 남 프랑스의 마르세이유로 피신했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극도의 공포와 피곤으로 뇌졸중을 일으켰었다.
해서 실명의 위기에 부닥쳤으며, 각종 신경계에도 종양이 생겨
긴급 수술을 받지 않으면 살아나기 힘든 지경이 됐었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유명한 유태계 의사가 파리에서 마르세이유까지 달
려가 어려운 수술을 통해 겨우 목숨을 건질 순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故 하스킬은,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다시 벼랑에서 돌아섰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까지 약 2年동안, 故 하스킬은 마르세이유 근교에서 숨어지내야만 했었다.
당시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바이올린 한 대와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였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49년에, 스위스로 망명한 故 하스킬은 스위스 국적
을 취득하여 활동하다가 1,960年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사망했었다.
그리하여 1,963年엔,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 故 클라
라 하스킬 국제 콩쿠르 ’ 가 창설되기도 했었다.
로마의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 대화는, 사고를 풍부하게 만든다. 그러나 고독은, 천재를 만든다. ’
물론 몇몇 음악적 친구들이 있긴 있었지만, 그녀는 항상 고독했었다.
그녀의 일생은, 고독한 동시에 위험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고독속에 침잠하게 만들었었다.
누가 그녀에게 말을 건네면, 그녀는 고개를 반쯤 돌려서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었다.
게다가 그녀는, 극도로 수줍어했었다.
“ 얼핏 보면, 마치 자신의 고유한 개성이라곤 없는 사람 같아 보였다 ” 라고
故 마르크스 해리슨이 말했을 정도로, 극도로 수줍음이 많았었다.
그녀는 또, 성격적으로든 · 음악적으로든 무엇 하나 과장
하거나 · 밖으로 발산하는 타입은 아니였었다.
항상, 말이 없고 · 수줍어했었다.
해서, 미국의 한 매니저는 “ 만약, 그녀에게 재능이 좀 더 부족
했더라면 오히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 라는 아이로니컬한 말을 던진 적도 있었다.
게다가 병약한 그녀는, 매일처럼 연습할 처지가 아니였었다.
소심하고 · 수줍은 성격 때문에, 많은 동료들과 교류
하면서도 배울 수 있는 형편도 아니였었다.
해서 그녀는, 이렇다 할 스승을 얻지도 못했었다.
故 코르토에게 배운 적은 있었으나, 당시 故 코르토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였었다.
결국 그녀에겐, 타고난 천재성과 영혼의 세계가 있을 뿐이었
고, 그녀 스스로 이 영혼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결코 까다로운 ‘ 고독주의자 ’ 는 아니였었다.
그녀와 관계한 모든 음악가들이, 故 하스킬에 대해 ‘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었다 ’ 라고 증언했었다.
아니 겸손이 지나쳐, 항상 자신의 연주가 부족하다고 한탄했었다 한다.
“ 청소부나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연주하는 것 외엔 무엇 하나 몸에 익힌 게 없으니 … . ”
라며, 연주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도 늘 그녀는 이렇게 한숨 짓곤 했었다 한다.
해서 그렇게 타고난 성격과 · 병과 · 전쟁 때문에, 그녀가 그나마 꾸준한 연
주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였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1,950年代의 십여 년이 그녀의 주요 활동기였었다.
이 기간동안 그녀는, 故 앙세르메 · 故 몽퇴 · 故 스토코프스키 · 故 카일베르트 · 故 마르케비치
· 故 첼리비 다케 · 故 프리차이 · 故 쿠벨릭 · 故 줄리니 · 故 카라얀 등과 협연했었다.
그리고 故 카잘스 · 故 안다 · 故 이자이 등과도 연주했었고, 이것으로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됐었다.
헌데 그 때쯤 되어서, 그녀는 이런 말도 했었다.
“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의 내 연주가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고는 생각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제 와서 모든 사람들이 내 연주를 듣겠다고 하니 말이에요 ” 라고.
그러나 말기의 그녀는, 항상 죽음을 의식했었다 한다.
특히 파리 연주회에서 심장장애를 일으킨 이후로, 이런 생각은 더욱 심해졌었다 한다.
연주 중에도, 자신의 생이 끝날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늘 그녀를 따라다녔었다 한다.
그래서 그녀에겐, 항상 그날의 연주가 생의 마지막 연주였었다.
해서 연주가 끝나면, 그녀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한다.
“ 이번에도, 또 집행유예가 내려졌군요 ” 라고.
헌데 1,960年 12月 故 하스킬은, 파리에서 故 그뤼미오와 함께 ‘ 소나타의
밤 ’ 공연을 마친 후, 다음 공연을 위해 기차로 브뤼셀에 갔었다.
해서 역의 계단을 내려오던 故 하스킬은,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일으켜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었다.
해서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실려간 그녀는, 잠시 의식을 찾긴 찾았었다 한다.
해서 그녀가, 파리에서 달려온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한다.
“ 내일 공연은 힘들 것 같구나. 그뤼미오 씨에게 죄송하다고 전해 주렴 ” 라고.
헌데, 참 안타깝게도 그 말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돼버렸었다 한다.
다시 혼수상태에 빠진 故 하스킬은, 그 이튿날 아침 故 모짜르트
가 먼저 가 있던 곳으로 홀연히 떠나고 말았었다 하다.
그녀의 예순여섯 살 생일을 한 달 남겨놓은, 1,960年 12月 7日의 이른 아침이었었다.
헌데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故 모짜르트 클라라의 천재적 직관력
과 기억력은 나이가 들어서도 쇠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몇 가지 기록들을 들춰 보면, 1,937年 그녀의 나이 마흔 두 살 때 갑자
기 故 브람스의 ‘ 피아노 협주곡 2번 ’ 을 연주하게 됐었는데, 그
녀는 이 곡을 이틀 만에 완전히 암기했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스위스에서 연주하기로 한 故 호로비츠가 제 때에 도착하지 않자, 불
안해진 지휘자 故 헤르만 셰르헨은 그녀에게 대역을 부탁했었다고 한다.
헌데 그 때 故 하스킬은, 故 리스트의 ‘ 피아노 협주곡 1번 ’
을 말 그대로 한나절 만에 암기해 버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