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모짜르트 - 바이올린 쏘나타 No 21 in E minor K 304
故 Mozart, Violin Sonata No 21 in E minor K 304
피아노 연주 : 故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
바이올린 연주 : 故 아르투르 그뤼미오
故 모짜르트, 바이올린 쏘나타 No 21
이 곡은, 故 모짜르트의 모든 바이올린 소나타 中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이 곡은,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中 유일한 단조의 작품이며, 故 프화르츠 선제후
칼 테 오도르비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 만하임 소나타 ’ 라고 불리는
6곡(파리에서 출판 · K 301 ~ 306) 中 제 4곡에 해당된다.
이 곡의 작곡 시기는, 故 모짜르트의 만하임 ~ 파리 여행에 동행했었던 그의 어머니
인 故 마리아 안나가 프랑스에서 죽은 1,778年 초여름이며, 그는 이 곡을 전 ·
후 해서 피아노 소나타 中 첫 단조 작품(A 단조 K 310)도 작곡했었다.
물론 故 모짜르트가, 이 작품들을 작곡한 동기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나 낯선 땅에
서의 고독감 때문이었는지 혹은 어머니에 대한 애도곡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멜
랑콜릭한 A단조의 피아노 소나타 못지 않게 긴장된 정서 표현은 돋보인다.
즉, 제 1악장 처음의 2개의 악기에 의한 유니즌으로 연주되는 구슬픈 가락의 주제며,
2악장 템포 디 메누엣의 우수를 머금은 아름다운 주제와, 중간부의 투명하고 ·
고요한 선율을 듣고 있으면, 언뜻 그의 커다란 눈망울 가득 고인 눈물이
금세라도 뚝뚝 떨어질 듯한, 소년의 애잔한 모습이 연상된다.
특히 이 故 모짜르트의 ‘ 소나타 집 ’ 은, 당대 최고의 두 연주가의 혼
연일체가 된 명연주로 길이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이 레코드에서는, 故 클라라 하스킬의 따뜻하고 · 유연하며 또 음악적으
로 순도 높은 피아노가 표현의 주도권을 쥔 채 2중주를 진행시키며, 故
아르투르 그뤼미오는 그 아름다움과 풍만한 표정을 억제하면서,
故 하스킬의 피아노에 맞추기 위해 청초하게 연주하기
때문에 다시 없는 앙상블을 이룩하고 있다.
해서 이 곡은, 이 두 사람들이 연주한 레코드 중
에서도 특히 뛰어난 명연으로 손꼽힌다.
바이올린 연주가, 故 아르투르 그뤼미오
故 아르투르 그뤼미오(Arthur Grumiaux · 1,921年生)는, 브뤼셀 음악원에서는 故 알프레
드 뒤보아로 부터 · 파리 음악원에서는 故 조르쥬 에네스코로부터 사사를 받았었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의 눈을 피해 지하활동을 하는 등 갖가지 고생을 했었으나
해방 후 파리에 등장, 파리 음악원의 관현악 정기 연주회에서 故 모짜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 3번을 연주해 ‘ 젊은 시절의 故 쟈끄 띠보와 똑 같다 ’ 라는 절찬을 받
았었고, 프랑스 · 벨기에 악파의 대표적 명수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었다.
그 후의 그는, 언제나 유럽 악단의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한편 1,9
49年부턴 모교였던 브뤼셀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했었다.
특히, 그의 섬세하고 · 날카로운 음색의 아름다움은 따를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1,986年에 사망하고 말았었다.
피아노의 성녀, 故 클라라 하스킬
‘ 故 클라라 하스킬, 그녀는 1,960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피아노의 성녀로 살았었다. ’
독일의 비평가인 요하임 카이저는, 그의 저서인 ‘ 우리 시대의 위대한 피
아니스트 ’ 에서 故 하스킬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었다.
故 하스킬은 1,895年, 루마니아의 부카레스트에서 태어났었다.
그녀는, 스페인계 유태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세 명의 딸 중 두번째였다.
그녀의 언니였던 故 릴리는 피아노를 배웠고, 동
생이었던 故 안느는 바이올린을 배웠었다.
故 하스킬도, 처음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같이 배웠었다.
이를테면, 그야말로 전형적인 음악 가정인 셈평이었다.
비록, 그녀가 네 살 때 그녀의 아버진 세상을 떠나고 말았었지만, 그러나 그
녀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마치 故 모짜르트를 연상하게 만든다.
아직 여섯 살이었던 때, 그녀는 故 모짜르트의 소나타 한 악장
을 단 한 번 듣고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따라 쳤었다.
물론, 그녀가 악보를 전혀 알지 못하던 때였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악장 전체를 다른 조로 바
꾸어서 쳐내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 즈음에서, 故 클라라는 故 브람스와 故 요아힘의 친구였던
故 안톤 도어에게, 자신의 연주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헌데 ‘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스 ’ 에서, 故 도어는 이렇게 말했었다.
“ 이 아이는, 기적이다 ” 라고.
그리하여 그녀는 1,905年, 열 살이란 어린 나이에 ‘ 뵈젠
도르프 협회 ’ 에서 솔로 리사이틀로 데뷔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녀는 파리 음악원에 들어
가 ‘ 故 가브리엘 포레 ’ 에게 배웠었다.
그러다 그녀는, 1,907年에 ‘ 故 알프레드 코르토 ’ 의 문하에 들어갔었으나, 3개
월이 지나자 故 코르토는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다고 말했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열다섯 살이 되던 1,910年에 파리의 콘서바토리를 졸업했었다.
졸업 시험관은, 故 포레 · 故 에네스쿠 · 故 모츠코프
스키같은 당대의 쟁쟁한 음악가들이었었다.
헌데도 그녀는 최고 상을 받았었고, 이 때부터 그녀의 연주 생활이 시작됐었다.
대바이올리니스트였던, 故 아자이의 반주자로도 기용됐었으며,
루마니아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故 에네스쿠와 협연하
기도 했었고, 故 파블로 카잘스와도 협연했었다.
헌데 1,911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유명하던 故 페루
치오 부조니가, 열여섯 살의 故 클라라를 불렀었다.
그리곤 故 부조니 자신이 편곡한 바 있는, 故 바흐의 ‘ D단조 샤콘느 ’
를 주문했었고, 故 클라라는 그 곡을 즉석에서 쳐내려 갔었다.
그리하여 감동한 故 부조니는, 베를린에 와서 자신의 제자가 되라고 권유했었다.
물론 ‘ 뉴 그로브 ’ 사전이나, 기타 자료에는 그녀가 이 시기에 베
를린으로 가서 故 부조니의 제자가 되었다고 나와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