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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글룩(Gluck) -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中 2막 2장 · 정령들의 춤

Classic Music

by tl3659\0\0 2019. 9. 18.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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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룩 -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中 2 2· 정령들의 춤

Dance of the Blessed Spirits fron Opera Orfeo and Euridice

故 크리스토프 윌리발트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




故 글룩, 정령들의 춤


‘ 정령들의 춤(Dance of the Blessed Spirit) ’ 은, 18세기 근대 오페라의 기틀을 마련한 독일의

작곡가였던 故 크리스토프 윌리발트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의 가장 혁신

작품인 ‘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pheus and Eurydice) ’ 나오는 곡이.


‘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 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3막의 오페라로, 죽은 아내를 다시 살

려내려고 저승으로 떠난 오르페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故 글룩은 이 작품에서 그 때

지 극 진행보다 음악이나 가수 위주로 작곡되던 오페라에 반기를 들고 드라마틱

극 진행을 위해, 음악과 노래가 하나가 되도록 하는 새로운 시도를 꾀했었다.


이 곡은,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오페라의 22장인 천국의 화창한 들판에서

들이 우아한 발레를 펼치고 있는 장면에서 연주되며, 플루트와 바이올린의

매우 우아하고 · 아름다워서 이 곡만 별도로 편곡해 연주되기도 한다.

 

즉 원곡은, 플루트 독주가 나오는 오케스트라 연주이지만, 피아노 · 바이

· 기타 등의 악기로 편곡돼 연주되기도 하는데, 특히 크라이슬러

가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편곡돼 더 유명해진 곡이다.


故 글룩의 오페라인, 이 ‘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 에는 2가지 판이 있다.

하나는 1,762(48세)에 작곡했다가, 2 뒤에 3막짜리로 개정한 이탈리어 판이고, 다른 하나

1,774(60세)에 프랑스인의 취향에 맞도록 발레나 합창을 추가한 프랑스어 판이다.


이 오페라는, 오페라의 개혁자로 불리는 故 글룩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인 바, 레치

보를 종전까지의 쳄발로 반주에서 오케스트라 반주로 바꾸기도 했고, 아리

와 레치타티보와의 융합을 시도했고, 또 대본에는 인간적 비극의

등을 다루는 등 여러가지 점에서 큰 혁신을 보인 작품이다.


대본은 이탈리아의 시인이었던 故 칼짜비지(R.Calzabigi)가, 그리스 신화에서 취재하여 쓴 것이다.

그러나 오페라에서는 비극적 결말이 아니고, 사랑의 신의 힘으로 오르

오와 에우리디체가 뜻대로 결합된다는 해피엔딩으로 돼 있다.


줄거리


지금은 죽고 없는 에우리디체를 깊이 애도하던 오르페오는, 사랑의 신으로

그녀를 이 세상에 데려올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를 허락받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한 가지 조건이 따랐었다.


그것은, 에우리디체를 이 세상에 데려올 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절대로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거였었다.


오르페오는 갖가지 시련을 다 이겼으나, 이제 한 고비

라는 시점에서 그만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만다.

맹세를 어긴 오르페오는, 절망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자살하려고 하지

만 사랑의 신은 그를 말리면서, 이 세상에는 사랑의 힘보다 

강한 힘은 없다고 하면서 에우리디체를 소생시켜준다.

거기서, 두 사람은 껴안는다.


작곡가, 故 글룩


그는, 18세기 중반에 이탈리아 오페라에 반기를 들고, 오페라 개혁 운동에 앞장섰었다.

그는 1,714,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에라스바흐에서 삼림 감독관의 아들로 태어났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소년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독학으로 악기 다루는 법을 익혔었다.


그는, 프라하 대학에서 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

버리지 못해, 중간에 그만 두고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갔었다.

당시 빈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크게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는

이것을 보곤 오페라 작곡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었다고 한다.


1,737, 故 글룩은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가서 故 삼마르티니(Giovanni Battista

Sammartini · 1,700 ~ 1,775 · 이탈리아의 밀라노)의 가르침을 받았었다.


그리고 1,741의 그는, 첫 오페라인 ‘ 아르타세르세 ’ 를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두었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그 후 4간 모두 9편의 오페라를 무대에

으며, 유럽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베네치아 · 런던 · 라하

· 빈 · 파리 등지에서 잇따라 오페라를 공연했었다.


1,750, 故 글룩은 18살의 어린 처녀 마리아 안나 베르진과 결혼했었다.

신부의 아버지는, 빈에서 사업으로 꽤 많은 돈을 번 사람이었는데, 그가 결혼할

당시에는 자식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었다.

해서 거부의 상속녀와 결혼함으로서, 故 글룩은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었다.


47세가 되던 1,761, 故 글룩은 본격적으로 오페라 개혁 작업에 뛰어들었었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극의 내용과 상관없이 가수가

나치게 기교를 과시하는 행태에 제동을 걸었었다.


음악이, 가사의 억양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도록 함으로

, 극음악 본래의 모습을 되찾도록 한 거였었다.

헌데 이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면, 무엇보다 좋은 대본이 필요했었다.

해서 그는, 이탈리아의 대본작가였던 故 칼차비지(Ranieri Calzabigi · 1,714 ~ 1,

795)와 손을 잡고 1,762에, 바로 이 ‘ 오르페오와 에우리디 · Orfeed

Euridice ’ 와 1,767 ‘ 알체스테 · Alceste ’ 와 1,770‘ 파

스와 엘레나 · Paride ed Elena ’ 를 잇따라 발표했었다.


헌데 이 오페라들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거였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가볍고 · 희극적인 내용의 오페라 부파가 인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시도는 큰 호응을 얻진 못했었다.


1,774, 故 글룩은 어린 시절 자신의 제자였던 故 마리 앙투

네트의 후원으로, 파리에서 ‘ 아울리드의 이피게니아

· Ifigenia en Aulide ’ 를 무대에 올렸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었다.


이에 힘입어 故 글룩은, 빈에서 발표했던 ‘ 오르페우스와

우리디체 ’ 의 프랑스어 판을 만들어 공연했었다.

이것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와 더불어 故 글룩의 인기도 높아졌었다.

하지만 이것이, 이탈리아 오페라 애호가들을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었다.

이탈리아 오페라 애호가들은, 故 글룩에 대항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작곡가였

던 故 피친니(Niccolò Piccinni · 1,728 ~ 1,800 · 이탈리아의 나

폴리)를 초청해, 두 사람이 같은 대본에 곡을 쓰도록 했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Iphigenie en Tauride)이다.

이후 그는 빈으로 돌아갔으며, 말년을 조용하고 · 편안하게

내다가 1,787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었다.


故 글룩은, 오페라를 개혁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유럽에서는 1,750年代부터, 이탈리아 오페라의 폐해를 개선하기 위한 이른바

오페라 개혁운동이 시작됐었는데, 故 글룩은 이 운동의 선구자였었다.





 

바이올린, 조슈아 벨(Joshua Bell · 1,967 ~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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