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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슈트라우스(Strauss) - 오페라, 살로메 中 일곱 베일의 춤 · 작품번호 54

Classic Music

by tl3659\0\0 2019. 8. 8.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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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슈트라우스 - 오페라, 살로메 中 일곱 베일의 춤 · 작품 54

Richard Strauss - Opera, Dance of Seven Veils from Salome, Op 54

지휘 : 故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아일랜드의 극작가였던, 故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 1,854 ~ 1,900)가, 성서와

사를 토대로 재창조한 ‘ 살로메 ’ 를 독일어로 번역한 故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

chard Strauss · 1,864 ~ 1,949)의 오페라는 지극히 퇴폐적이다.


유대를 다스리는 헤로데는, 그의 왕비가 데려온 의붓딸인 살로메의 관능미에 사로잡혀 있고, 살로메

시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의 늠름한 육체에 반한 것은 물론, 자신을 경멸하는 예언자를 정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왕비는,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의 잘린 목을 요구한다.


해서 일곱 베일의 춤은, 그 욕구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춤을 추라는 헤로데의 요청에, 살로메는 어떤 요구든 다 들어준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리고는 자신의 옷(베일) 을 하나씩 서서히 벗어내면서,

아버지의 훔쳐보기 정욕을 한껏 달구는 것이다.


‘ 살로메 ’ 는, 단막 오페라이다.

이 작품속 인물인, 나라보트와 헤롯은 살로메를, 살로메는 요한을 광적으로 갈망한다.

음악학자인 멜라니 운젤트(Melanie Unseld), 이들의 광기를

 세기말적 부르주아 사회의 억압된 히스테리 ’ 로 칭하였다.


해서 이 오페라가 살로메의 처형으로 끝나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질서의

을 의미하는데 은밀한 관음적인 시선은 허용하지만, 광기의 표출

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 당시 사회의 특징이기 때문이었다.


‘ 살로메 ’ 가, 유럽 극장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것은 ‘ 관객들이,

대 예술을 감상한다는 명분 아래, 억제된 욕망을 실현할 수

었기 때문 ’ 이라고 당대 평론가들은 입을 모았.


이 오페라의 내용인즉, 기원전 1세기 때 유대 왕 헤로데의 궁전에선 화려한 연회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연회장 문 앞엔, 경비대장 나라보트와 그의 부하 앞으로 살로메 공주가 정원을 거닐고 있다.

홀린 듯 공주를 바라보는 나라보트에게, 시종은 정신 차리라고 경고한다.


그때, 궁전안 감옥인 우물속에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한이 큰 소리로 ‘ 남편을 죽이

, 남편의 이복동생인 헤로데와 혼인한 헤로디아스의 죄 ’ 를 비난한다.

 

이때 살로메는, 자신을 탐하려는 계부인 헤로데 때문에 언짢아 연회

에서 나오던 중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곤, 경비대장인

트에게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한을 데려오게 한다.


헌데 그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와 외모에, 욕정을 느낀 살로메는 “ 나는, 당신의

몸에 반했어요. 당신의 입술에 키스할 거예요 ” 라며 욕망을 불태운다.


그러자 흠모하는 여인인 살로메가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인 세례자 요한

게 욕정을 드러내자 충격을 받은 나라보트는, 그만 자살하고 만다.


나라보트의, 그런 갑작스런 자살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 그녀는 최면에 걸린 듯 요한에게 구애를 계속한다.


하지만 요한은, 전혀 감동없이 “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리의 예수 뿐 ” 이라고 말하고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버린다.

이때, 헤로데 왕이 의붓딸인 살로메를 찾으러 밖으로 나오자, 유대인들이 요

한의 처형을 요구하지만, 요한을 두려워하는 헤로데는 거부한다.


다시 요한의, 헤로디아스의 죄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헤로디아스는 “ 저 소리를 멈추게 하라 ” 라고 외친다.


한편 헤로데는살로메에게 자신을 위해 춤을 추면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하

, 그녀는 관능적인 음악에 맞춰 섹시한 몸짓으로 베일을 한 겹씩 걷어내는,

그 유명한 춤인 ‘ 일곱 베일의 춤 ’ 을 추며 헤로데의 넋을 빼앗는다.


훗날 많은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된 이 춤곡은, 이국적인 동방의 선

시작해 유럽적인 왈츠 선율로 절묘하게 고조돼 간다.


이 음악은 ‘ 햇빛에 영롱하게 빛나는 오묘한 빛깔의 비단 ’ 같은,

악을 추구했던 故 슈트라우스의 의도가 실현된 곡이다.

물론 이 곡은, 성적 유혹이지만 당시 부르주아 사회의 규범

과 종교적 관념에 대한 도발을 의미하기도 했었다.


헌데 춤을 끝낸 살로메는, 헤로데에게 은쟁반에 요한의 머리를 담아서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당황한 헤로데는, 보석 등의 다른 선물로 대체하려

지만, 그녀는 집요하게 요한의 머리만을 요구한다.

해서 헤로데는, 별 수 없이 요한의 사형집행을 승인한다.


그리곤 병사가 요한을 죽인 뒤, 그의 머리를 은쟁반에 담아오자,

메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듯, 요한에게 말한다.


“ 당신은, 키스하지 못하게 했지. 하지만 이제 내가, 당신에게 키스할 거야 사랑의 신비

, 죽음의 신비보다 더 위대해 ” 라며, 죽은 요한의 입술에 열으로 키스한.


그러자, 그 광경을 더 이상 참지 못한 헤로데가 “ 살로메를 죽여라 ” 라고

병사들이 달려들어 방패로 살로메를 찍어눌러 죽이며 막이 내린다.


극작가, 故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 1,854 ~ 1,900), 아일랜드 출신의 극

가이자 소설가 · 시인으로, 19세기 말 대표적인 유미주의자였었다.


그는, 뛰어난 재기(才氣) · 쾌락주의와 유미주의 · 스캔들 등 주목받는 사교계 인

사였으며, 때문에 작품보다 사생활이 더욱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었다.


그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

그의 아버지故 윌리엄 와일드 경은, 영국 최초의 안과병원을 설립한 의사이자 저명한 민속

였으며, 어머니故 제인 프란체스카 엘지 와일드 역시 스페란차(Speranza · 이탈

아어로 ‘ 희망 이라는 의미) ’ 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저명한 시인이었.

해서 그의 어머니는,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9세 때 북아일랜드의 포토라 왕립학교에 입학했는데, 공상

좋아하고 책만 읽던 소년이라 선생들이 다루기 힘든 아이였다고 한다.

17세 때의 그는,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에 들어가 고전문학을 전공했.


이곳에서그는, 교수였던 존 마하피의 영향으로 그리스 문학에

했으, 우등상인 버클리 골드 메달을 받고 졸업했.

20세 때엔 옥스퍼드 대학교 맥덜런 칼리지에 진학했으며, 이곳 교수였던 존 러

스킨과 월터 페이퍼의 영향으로 유미주의와 데카당스 운동에 빠졌.


그리고 그는, 재학 중에 쓴 시 라벤나 로 뉴디게이트상을 수상했고,

학을 졸업한 후 런던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

헌데 그는, 런던으로 향하면서 “ 나는, 시인 · 소설가 · 극작가가 될 거다. 어떻게 해서든, 유명해질 것

이다. 만약, 작가로 명성을 떨치지 못한다면 악명이라도 떨칠 것이다 ” 라고 말했다고 한다.


예술가란,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그는 런던에서도 유미주의 운

, 빅토리아 시대의 인습에 도전하는 젊은 예술가그룹과 교류했었다.

이들은, 예술의 기준을 도덕이 아닌 ‘ 미 에 두었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했었다.


1,881의 그는첫 시집인  시편들 을 펴낸 이후로 희곡인 베라 혹

은 니힐리스트 · 파두아 공작부인 ’ 등을 써서 무대에 올렸.

그러나 이 작품들은, 큰 반향은 일으키지 못했.

오히려  시편들 , 옥스퍼드 대학의 토론 학회인 옥

스퍼드 유니언으로부터 표절 시비에 올랐.


그런 한편  오스카 와일드는, 작품보다는 긴 머리에 공작 깃털 · 벨벳 바지 같은 괴상한

옷차림 · 사회와 종교의 위선에 대한 재치 있는 독설들로 먼저 이름을 떨쳤.

이는, 그가 런던에 올 때 처음 선언한 대로 악명이었.


그러나 1,880年代에 유미주의는, 런던 문단에서는 크게 유행했을몰라

여타의 사람들에게는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았는데, 스카 와일드

는 유미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 많은 풍자의 대상이 었다.


해서 그는 1,882, 유미주의에 대한 미국 순회 강연에 나섰고,

연을 통해 거침없는 언변과 풍부한 교양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故 오스카 와일드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


그러면서 1,880年代 중반까지그는, 대중잡지인  숙녀의 세계 ’ 편집자로 일하면

예술과 인생에 대한 에세이 · 시 · 희곡 · 단편소설들을 근근이 발표했.

 

그러다가 1,888의 그는, 창작 동화집인 ‘ 행복한 왕자와 그 밖의 이야

들 ’ 을 펴내면서, 소설가로 대중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

흔히 ‘ 어른들을 위한 동화 ’ 라고 일컬어지는, 이 작품집에서 故 와일드는 영국 귀족사회에 대

모순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우아한 문체와 날카로운 위트로 써내려갔.


그런 한편 故 와일드는 1,885, 더블린 왕실 변호사의 딸인 콘스탄스 로이드와 결혼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면서 동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중인 1,890年代 중반, 

와일드는 스캔들에 휩싸이면서 급격히 몰락했.

그는 1,891,퀸즈베리 후작의 아들로 옥스퍼드 출신인 22

세의 앨프레드 더글러스와 친분을 나누게 었다.

앨프레드, 도리언 그레이가 현실 세계에 나타났다고 할 만큼 아름다

자였고,와일드는 그 청년에게 매료된 나머지 희곡을 써서 번 돈을

모두 그 청년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한 故 퀸즈베리 후작은 1,895年 故 와일드의

인 클럽을 방문해, 자신의 명함에 ‘ 남색가를 자처하는 와일드 씨에게 

라고 적어두고 나왔고, 이 문제는 공공연한 가십거리가 었다.


와일드는, 故 퀸즈베리 후작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나, 조사 과정에서 와일드

앨프레드에게 쓴 연애편지와 와일드가 관계를 맺었다고 추정되는 남성 

부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동성애자 혐의를 받곤 2간 수감었다.


해서 故 와일드는, 그해 11에 파산했었다.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곤 그를 떠났고, 아들들은 ‘ 와일드 ’ 라는 성을 버렸으

, 이듬해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등 불운이 계속었다.


레딩 교도소에서 중노동을 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동안, 그는 앨프레드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후일 ‘ 옥중기 ’ 로 출간됐었다.

한편, 수감생활을 하던 중 아내를 살해하곤 처형된 기병대원이었던 故 샤를 올리즈에 관

이야기를 듣곤, 출옥 후 이를 소재로 장시인 ‘ 레딩 감옥의 발라드 ’ 를 썼.


그리고 1,897에 출소한 와일드는, 곧바로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 갔었다.

한동안 프랑스에서 지내던 그는, 이탈리아에 여행을 갔다가 나폴리에서 앨프레드와 재회했었다.

그러나 앨프레드는, 2간의 수감 생활로 외모는 망가지고 · 파산 후 돈 한푼

와일드에게 더는 매력을 느끼지 못해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몇몇 지인들의 도

움으로 근근이 연명하다가 1,900 1130파리의 

초라한 호텔 방에서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었다.


헌데, 당시 39세였던 故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연극 ‘ 살로

메 ’ 독특한 분위기에 완전히 매료됐었다고 한다.


그가, 살로메의 작곡을 결심했을 땐 ‘ 돈 후안 ·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

장난 ·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와 같은, 자신의 대표

적 교향시에 힘입어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故 슈트라우스가 직접 쓴 이 오페라의 대본 속에는, 원작

관음적인 시선과 탐미주의가 그대로 살아 있다.

‘ 아름다움을 탐하는, 위험한 시선 ’ 에서 출발하는, 이 오페라의 초연은 1,9

05 12 9 드레스덴 궁정 오페라 극장에서 이루어졌.




악단비엔나 필하모니카(Wiener Philharmoniker)


https://youtu.be/-bGrN1UAE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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