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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베토벤(Beethoven)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2번 바장조, 작품번호 50

Classic Music

by tl3659\0\0 2018. 7. 24.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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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베토벤 - 바이올린 · 관현악의 로망스 2번 바장조 작품 50

Beethoven, Romance for  Violin and Orchestra No 2 in F major op 50

바이올린 : 故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




故 베토벤,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2


故 베토벤은, 독주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두 곡의 ‘ 로망스 ’ 를 작곡했었다.


헌데 이 곡은, 풍부한 화성으로 잔잔하며 · 고요한 분위기의 G조와

, 목가적이며 · 밝고 · 랑스런 느낌을 주는 F장조, 곡 모두

합주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곡이다.


故 베토벤이, 그 어떻게 이런 달콤한 곡을 쓸 수 있었을까 싶어 이상하기까

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 로망스 ’ 란 이름의 두 곡이다.


이 두 곡은, 故 베토벤이 32 ~ 33세였던 1,802年에서 1,803年 사이

쓴 곡으로, 청년기 젊은 날의 밝은 서정이 감미롭게 배어 있다.


바이올린의 기본 지식은 풍부했었지만, 스스로는 그저 무난한 수준

의 바이올리니스트밖에 안됐었던 故 베토벤으로서는 느린 바

이올린 독주 음악을 쓰는 편이 쉬웠을지도 모른다.


해서, 젊음의 패기 넘치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

기 위한 습작쯤 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故 베토벤은, 두 곡에 모두 만족하곤 1,80

3 1,805출판했었다고 한다.

사실은 제 2번이 먼저 작곡됐었는데, G장조를 먼저

출판했기 때문에 1번이 됐었다 한다.


이 곡을 쓴 1,802, 베토벤은 실제로 자살을 생각하곤

이리겐슈타트의 유서 ’ 라는 것을 쓰고 있었다 한다. 

그의 청각이 점점 이상해지면서, 연애에서도 실패

해 절망에 빠져 있던 시절이었었다 한다.


그런데 그가, 그 어떻게 이런 달콤하고 · 아름다운 선율의 로

망스를 쓸 수가 있었는지 미스터리일 수밖에 없다.

아마 그는, 현세의 절망감을 작품세계에서의 감미로

으로 승화시키고자 했었던 것은 아닐지 … .


그리고 두 편의 로망스 모두, 얼핏 단순해 보이는 외양

속에 위대한 작곡가의 혼을 감추고 있다.

허나 제 1번 보다, 2번의 인기가 더 높다.

독주 선율의, 화려함 때문인 것 같다.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그는 1,908 9 30,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남부에 있는 오데사에서 출생해 1,97

41024 암스테르담에서 급서한, 구 소련의 명 바이올리니스트였었다.


그는, 아우어(Auer) 악파와는 접촉이 없어 오데사에서 바이올린을 배웠

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악파를 대표하는 대가로 성장했었다.

그리고 그의 음색은 따뜻하고 · 박력이 있었으며, 기교는 완벽

예술적 기교와 음악성이 멋지게 융화돼 있었다.


1,935의 그는, 비에니아프스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의 제 2· 1,

937年엔 브뤼셀의 이자이 국제 콩쿠르의 1위에 입상했었다.

헌데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 미아코프스카 · 하차투

안 러시아의 현대 작곡가들이 신작을 그에게 헌정했으,

올린 레퍼토리 확장에 공헌하는 바도 컸었다.


만년의 그는, 오랜동안의 꿈이었던 지휘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었다.

그의 아들인, 이고르 오이스트라흐(1,931年生)도 뛰어난 바이올리니

스트인데, 그러나 위대한 아버지를 능가하지는 못할 것 같다.


故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1,955 11, 처음으로 미국에 연주

행을 떠나기 전의 그의 명성은 뜻밖에도 레코드를 통하여 

아져 있었으며, 그의 첫번째 미국 공연은 ‘ 다비드 오이

흐 ’ 는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 , 증명할 절호의 기회였었다.


헌데 故 오이스트라흐의 경쟁 상대는, 거의 모두 그와 같은 나라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모두 유태계 러시아인이었기 때문이었었다.

, 故 야사 하이페츠 · 미셔 엘먼 · 네이선 밀스타인 · 아이작 스턴 · 

후디 메뉴인(뉴욕 태생이나 양친은, 유태계 러시아인) 등이었었다.


그리고 운집한 청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네기 홀에서 연주

이스트라흐의 미국 데뷔는 획기적인 대성공이었었다.

“ 그의 연주 스타일은 전혀 빈틈이 없다다비드 오이스트라

능가할 바이올리니스트는 어디에도 없다 ” 라고 

· 1,955 1128 ’ 지는 절찬했었다.


헌데 故 오이스트라흐의 외모는, 무뚝뚝한 사업가처럼 보였었다.

그는 보통 체구(5피트 6인치 = 160cm)에, 뒤로 넘긴 머리의 얼굴은 더욱 크게 보였었다.

해서 영국에선, 그를 ‘ 베터드 소크라테스(battered Socrates) ’ 라는 별명을 붙였었다.

‘ 베터드 ’ 란 ‘ 낡은 · 찌그러진 ’ 이란 뜻으로, 복서 등이 얼굴에 펀치

얻어맞아, 일그러진 표정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형용사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를 경멸해서 한 말이 아니라, 위트가 풍

부한 영국인들로서는 매우 애정이 담긴 말이었었다.


게다가 47세 때, 미국에서 데뷔하기까지 20 동안 유럽을 연주여행를 했음

에도 불구하고, 故 오이스트라흐는 러시아 어를 제외하곤 이디시(

대인의 혼성언어) 사투리의 독일어 밖에는 하질 못했었다.


또한 故 오이스트라흐는, 오데사의 가난한 경리 사원의 아들로 태어났었다.

해서 그는, 반 농담조 로 자기 성의 뿌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곤 했었다.

“ ‘ 오이 ’ 라고 하는 것은, 이디시 어로 감탄사 이고 ‘ 스트라흐 ’ 는 러시아 어로 ‘ 공

’ 를 의미한다. 해서 독일 어의 ‘ 오에스텔라이히(오스트리아) ’ 는 우리 

의 먼 조상이 살고 있던 나라이다 ” 라고 말하기도 했었었다고 한다.


게다가 또 그의 아버지는, 가끔 실직을 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오

“ 그러나 나는, 아무런 ‘ 스트라흐(공포) ’ 도 기억하지 못한다 ” 라고 말하기도 했었

다던 故 오이스트라흐는 “ 난, 젊었을 때는 굶주림같은 것을 별로 괴롭게

각하지진 않았으니까 ” 라고 태연하게 말하기도 했었었다고 한다.


물론 제정시대의 러시아에서는, 유대인에게 개방

된 직업이란 극히 제한돼 있었었다고 한다.

해서 음악은, 유대인이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었었다고도 한다.


해서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그의 아버진자기가 이루

못한 꿈을 아들을 통해 실현시키려 했었었다고 한다.

해서 故 다비드는, 다섯살 때 1/8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같게 됐으며 1/4 ·

1/2을 거쳐, 마침내 풀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갖게 됐었었다고 한다.


헌데 그가 아홉살 때 있었던 혁명도, 그의 운명을 바꿔놓진 못했었었다 한다.

해서 그는 음악원을 졸업하자마자, 레닌그라드에서 시베리아까

연주여행을 하면서, 집안살림을 꾸려나갔었었다 한다.


“ 나는 대도시에서나, 작은 도시에서도 연주를 했었다. 좋은 지

자나, 형편없는 지휘자와도 협연을 했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있어 매우 훌륭한 인생 경험이 됐 ” 라

, 그는 말하기도 했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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