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쇼팽(Chopin) - 피아노 협주곡 2번 바단조, 작품번호 21
故 Chopin, Piano Concerto No 2 in F minor Op 21
피아노 : 故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故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청년시절 그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쓴 작품이며, 협 주곡을 쓰던 당시 故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에 재학 중이었었다. 故 쇼팽은,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니며 성악을 전공하던 故 콘 스탄치아라는 여인에게 사랑에 빠졌었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담아 2악장을 작곡했었다. 故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故 쇼팽의 첫사랑이었던 故 콘스탄 티아에 대한 젊은 날의 연민과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특히 2악장 라르게토는, 첫사랑이었던 故 콘스탄티아에 대한 청 춘의 애환과 순정이 그대로 건반으로 옮겨져, 건반 하나 하나에 故 쇼팽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이 쏟아 질 듯이 아름답다. 별이 많은 밤에 이 대목을 들어 보면, 피아노의 한 음 한 음이 모 두 별을 그려내는 듯하여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이다. 당시 故 쇼팽은, 故 로시니 · 故 벨리니와 같은 당대 유명한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에게도 영향을 받았었는데, 오페라의 아리아와 같이 노래하 듯 흐르는 2악장의 아름다운 선율은 성악을 전공하던 故 콘스탄치아를 생각하며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故 쇼팽은, 친구였던 故 티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 2악장은, 콘 스탄치아에 대한 연정으로 물들어져 있다 ” 라고 고백했었다 한다. 하지만 故 쇼팽은 소심한 성격 탓에, 그녀에게 끝내 고백 한 번 하지 못한 채 폴란드 를 떠났었고, 바로 이 ‘ 피아노 협주곡 2번 ’ 도 故 콘스탄치아가 아닌 파리에 서 친하게 지냈던 故 델피나 포토츠카 백작부인에게 헌정했었다. 그리고 故 콘스탄치아는, 故 쇼팽이 죽고 난 후에야 故 모리츠 카라소프스 키가 쓴 故 쇼팽의 전기를 읽곤, 그의 마음을 알게 됐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 故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
탁월한 피아니즘으로 건반의 황제라 불렸던, 피아니스트인 故 아르투르 루 빈스타인은 1,887年 故 쇼팽의 나라인 폴란드에서 태어났었다. 세 살 때부터, 피아노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신동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서너 살 무렵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던 故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과 만남을 가졌었다. 처음 들은 멜로디를 자유자재로 연주하고, 조를 바꾸어 연주하는 모습을 본 故 요아힘은 그를 故 리스트의 제자이자 유명한 피아노 교수인 故 칼 바르트(Karl Heinrich Barth)에게 보냈었다. 故 칼 바르트 교수의 조련을 거친 故 루빈스타인은, 11세에 자신의 재능을 처음으로 알아 봐 준 故 요아힘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故 모 짜르트의 ‘ 피아노 협주곡 A장조 ’ 협연하면서 국제무대에 데뷔했었다. 그리하여 1,904年 파리로 건너간 故 루빈스타인은, 화가였던 故 피카 소 · 작곡가였던 故 폴 뒤카스 · 인상주의 음악가였던 故 라벨 등 과 교류하며, 풍부하고 · 깊은 음악성을 키워갔었다. 그러나 1,906年, 뉴욕 카네기 홀에서 가진 미국 데뷔 연주가 혹평으로 끝난 후 , 그는 한때 깊은 슬럼프와 절망에 빠져 생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 으나, 다시금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연주 생활을 이어갔었다. 그렇게 한 차례 위기를 극복한 후의 그는, “ 무대에 서는 것,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자 기쁨입니다 ” 라고 말할 정도로 열정을 되찾 아, 청중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찾아다녔었다 한다. 그리고 그는, 1차 대전 때 통역병으로 활동하다 만난 바이올리니스트였 던 故 외젠 이자이(Eugène Ysaÿe)와 함께 군부대를 다니며 위 문 연주를 하기도 하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故 히틀러 의 유태인 탄압을 피해 미국에 정착했었다. 그는 이 시절, 바이올리니스트였던 故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 · 첼리스트 였던 故 엠마누엘 포이어만(Emanuel Feuermann)과 함께 트리오를 결성 했었는데, 훗날 故 포이어만 대신 故 피아티고르스키(Gregor Pia tigorsky)가 합류하게 됐던 이 트리오는, 이른바 ‘ 백만 불짜리 트리오(The Million Dollar Trio) ’ 라 고 불리는 전설적인 존재로 남았었다. 미국에 정착한 후부턴, 故 루빈스타인의 새로운 음악 인생이 시작됐었다. 즉 그는, 데뷔 연주의 악몽을 딛고 1,947年 카네기 홀에서 가진 리사이틀에선 “ 거인이 되어 돌아왔다 ” 라는 호평과 함께 큰 성공을 거두었었다. “ 여섯 개의 손과, 서른 개의 손가락을 가진 연주자 ” 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화려하고 · 강력한 테크닉을 자랑했었으나, 그러나 故 루빈 스타인은 하루에 3시간 이상 연습한 적이 없었으며, 자신 은 게으른 연주자에 속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연 습에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귀와 엄청난 집중력 덕분에 오랜 동안 탁월한 테크닉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1,956年의 故 루빈스타인은, 미국 데뷔 5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2주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17곡의 협주 곡들을 연주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 후, 60대 이후의 나이에도 해마다 100회 이상의 연주를 소화 했었던 그는, 동시대의 피아니스트였던 故 호로비츠(Vla dimir Horowitz)와 종종 비유되기도 했었다. 까다롭고 예민했었던 故 호로비츠와 달리, 故 루빈스타인은 친화력 넘치고 ·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샀었다. 그러나 1,970年代까진, 왕성한 연주 활동을 이어갔었던 故 루빈스 타인은 1,976年 89세에 은퇴했었다. 후 6年이 지난 1,982年 95세에 그는 이 세상을 떠나 귀천했었다.
전 악장들, 이어 듣기 제 1 악장은, 1번 협주곡에 비해 전체적으로 구성이 간결하다. 형식은, 전통적 협주풍 소나타형식이지만, 조성은 독자적인 면도 보인다. 곡 첫머리에 모든 관현악의 합주가 있고, 현이 아름다운 제 1주제를 제시한다. 이어 오보에가 Ab장조의 제 2주제를 나타내고, 그것이 제 1바이올린으로 이어져 간 후 바로 독주 피아노가 나타나고, 서주적 진향이 있은 후 제 1주제를 다시 제시하고 , 그것을 처리하여 화려한 경과구를 지나 다시 제 2주제를 역시 Ab장조 로 연주한 뒤, 피아노가 E단조의 새로운 자료를 유도한다. 전개부에서는, 제 1주제만이 취급되며 피아노와 관현악이 서로 어울려 처리하 며 형식대로 재현부를 지나 제 1주제에 의한 짧은 코다로 악장을 마친다. 제 2 악장 : 라르게토(Larghetto) A장조 4/4 박자 첫사랑을 그리며 작곡한, 깊은 정서로 되어 있는 악장이다. 조금 길지만, 매우 감미로운 주제가 세 번 반복되는데 그 때마다 장식이 복잡하고 정취가 극을 이룬다. 애틋한 정서로 가득차 있는 악장으로 청년시대 였던 故 쇼팽의 작품 중 가장 순수한 감 정을 단적으로 나타낸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곡의 형식은, 일종의 녹턴풍이다. 좀 느리기는 하지만, 매우 달콤한 주제가 세 번 반복되는데, 그 때마다 장식이 복잡하고 · 정밀해지며,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 레치타 티보풍의 간주가 삽입돼 더욱 열정적인 정서를 나타낸다. 또한 피아노가 이 간주를 연주할 때, 현이 이를 떠 받치며 마지막에는 짧은 코다로 끝난다. 제 3 악장 : 알레그로 비바체(Allegro vivace) 3악장의 구성은, 매우 약하다. 전곡은, 마주르카풍의 리듬을 가지는 여러 주제로 구성돼 있 으나 1번의 피날레처럼 빛나는 효과는 볼 수 없다. 처음엔, 피아노에 의해 제 1주제가 나타나고 관현악의 전 합주에 이어 제 1주 제가 장식을 달리하여 재현되며, 이어서 피아노의 하강 반복 진행이 있 은 후 3잇단음표의 화려한 패시지에 이어, 관현악이 연주하는 제 1주제를 지나 피아노는 Ab장조, 스케르찬도의 제 2주제를 제시하지만 매우 인상적인 선율이다. 이 주제가 처린된 후, 제 1주제가 재현되며 마지막에는 호른의 신 호에 따라 최종 단락에 이르고, 여기서 피아노가 3잇단음표 적인 음형 처리를 마치고 화려한 코다로 들어선다.
故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 故 콘스탄티아 그라드코프스카를 꿈에 그리면서, 작곡된
그 이윤, 손이나 기억력이 아닌 현저히 떨어진 그의 시력 때문이었으며, 그
제 1 악장 : 마에스토소(Maesto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