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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11

위안부 증언·사진

by tl3659\0\0 2017. 7. 5.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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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학순 할머님의 흉상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11

 

 

 

일본군 위안부의 첫 폭로자이신, 故 김학순 할머님의 증언 

 

1,922年 평양 태생인, 故 김학순 할머님의 아버지는 독립 운동가였었다.

해서 어린 그녀는, 북만주에서 간도까지 드넓은 만주 땅을 헤매고 다녀야만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어,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 정착

했었지만 어린 그녀의 고생문은 오히려 그 때부터 본격

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셈평이 돼버렸었다.

 

왜냐하면, 어린 그녀의 어머니는 재혼해버려 어린 그녀는 기생집 양녀

가 돼 평양기생 권번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17살 때, 양아버지에게 이끌려 중국으로 갔었다.

헌데 그것도 모자라, 어린 그녀의 양아버지는 중국의 일본군

부대에 어린 그녀를 팔아넘겨버리기까지 했었다.

 

그리하어린 그녀는, 일본군 장교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그 기점으로 해 몸서

쳐지도록 그 지긋지긋한 위안부 생활이 시작된 거였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그 형편이 어떠하였는지는 구구히 말할 것이 없이, 그녀의

격정적인 회고를 가져오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 여자란 것은 언제나 생리가 있는데, 그 때도 가리지 않아요. 그 사람들은.

생리고, 뭣이고가 없어요. 무슨 짐짝 끌어가듯, 자기네 맘대로 쓰고 싶으면 쓰고.

고장이 나서, 말하자면 병이 나든가 하면 버려 · 버려. 죽여 버리고 … . 

말이 17살이지, 17이 넘은 것도 아니고 16살 조금 넘은 걸 끌고 가서 강제로 … .

울면서 안 당할려고 막 쫓아나오면, 안 놔 줘요. 붙잡고,

안 놔 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했어요.

 

해서 어린 그녀는, 일본 관헌이나 군대에 의해 끌려갔거나 · 돈 몇푼에 팔려갔거

· 입 하나 덜자고 내팽겨쳐져선, 일본군들의 성욕을 충족시키는 위안

소에 처박혀야만 했었던 수많은 어린 위안부들 중의 하나였었다.

 

일이십 명도 아니고, 수천 단위의 어린 위안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린 그녀들은 전쟁 이후 해방된 나라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존

재를 밝히고 · 그 피해를 위로한 정권은 남과 북을 통틀어서도

 없었고,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이도 없었다.

 

그렇게 수천 명의 과거가 꽁꽁 숨어버린 이유 중 하나는, 김학순 할

머님삶의 궤적에서도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다.

 

 

어린 그녀는, 몇달 동안 일본군 위안소라는 이름의 지옥에 있다가

다행히도 어느 한 조선 상인의 도움으로 탈출했었다.

 

그리곤 그 조선 상인과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꾸리나 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제 남편에게서도 끊임없이 그 지옥을 상기당한다.

 

남편은, 술만 취하면 그녀를 윽박지르고 · 학대했었다.

너는, 위안소 출신이지. 더러운 년.

 

그 옛날 병자호란 때, 적군에게 끌려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절개를 더럽혔다며

을 하지 않던 비겁한 수컷들의 DNA는 시대와 세월을 넘어 유구했,

순 할머님과 비슷한 처지의 수많은 여성들은 한평생 벙어리

로 살거나 · 천덕꾸러기로 수모를 감당해야만 했었다.

 

해서 그런 분위기에선 나는, 위안부였다. ” 라고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서 전쟁을 전 · 후하여, 남편과 딸을 잃고 · 하나 있던 아들마저 어려서 물에 빠

죽은 후, 400만원짜리 단칸방에 살며 날품팔이 · 행상 · 파출부 등 온

갖 신산을 다 겪으며 혼자 세상을 살아낸 학순 할머님도,

지옥같은 과거를 꼬깃꼬깃 접어 가슴에 파묻어 두

고 있었고, 나이 들어 죽으면 그녀와 함

께 재로 변할 판이었다.

 

 

다른, 모든 위안부들의 사연과 같이.

그런데 1,990 6月의 어느 날, 옹매듭이 지어져 있던 그녀

가슴의 봉인이 찢겨나가는 일이 벌어졌었다.

 

고단한 몸으로 응시하던 TV 화면에서, 일본 정부가 “ 일본군은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 라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때, 그녀는 눈앞이 하얗게 되는 분노에 휩싸인다.

 

“ 그렇잖아도, 언젠가 이 말을 한 번 해 볼까 말아 볼까 , 마음 속으로 밤 · 낮 가지고 있는데.

그런 말이 지나가는 것을 들으니까, 정말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어요.

 

하지만, 내 혼자서 이럴 수 있느냐., 우리는 지나간 일을 이렇게도 모르고 사냐, 답답하게.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증인이 이렇게 있는데세상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을 하니까 .

 

일본놈의 새끼가, 군인 새끼가 이렇게 당했던 사람을 몰라요?

일본 정부에서는 없대요, 없대요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 나와요!

 

마침내 1,991814日 광복 46주년을 하루 앞두고故 김학순 할

머님은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사무실을 찾아갔었다.

 

그리곤 국내 거주자로서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해,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는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며,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했었다.

 

 

故 김학순 할머님이 TV에 등장해 피맺힌 과거를 털어놓는 동안, 전국

곳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도 함께 무너져 내렸었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문필기 할머님도, 그 중 한 분이셨었다.

“ 맨 처음 김학순 … , 어느 날 저녁에 텔레비전을 본께네 막 우는 거야.

나도, 앉아서 막 울었어. 거기서 우는 것을 본께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얼마나 같이 우는데, 가만히 난중에 들으께네 노 대통령이

 625日까지 신고를 … , 신고를 하라 카더라고.

 

아니 故 김학순 할머님이 토해놓은 증언들은, 화석이 되어 가던

피해자들의 과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었다.

 

아니 故 김학순 할머님의 증언은, 사회적인 관심을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했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여성단체에 위안부 피해자들의 신고전화가 개통됐었다.

용기 있는 첫 증언의, 파급 효과는 컸었다.

 

그 때까지 차마 그 어느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꽁꽁 숨어

서만 살던 후속 증언자들이 줄을 이었었다.

 

1,991에만, 10여 명의 생존자들이 신고를 했었다.

해서 이젠 위안부는, 일본군 성노예는 정처 없는 전설이 아니였었다.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아니었다.

글귀 몇 자로 역사 교과서에 남을, 파편적인 사실이 아니게 된 거였었다.

 

하지만 故 김학순 할머님은, 일본 민간 단체에서 주는 ‘ 위로금 ’ 도 거절했었다.

故 김학순 할머님이 요구한 것은,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이었다.

우리 정부가, 임대아파트도 주고 · 돈도 주는데, 내가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故 김학순 할머님이, 자신의 위안부 경력을 밝힌 것을 단 한 번 후회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형편이 어려운 할머님들이 일본 민간의

금을 받으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라고 한다.

 

김학순 할머님은,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었다.

“ 더러운 돈 몇푼으로, 역사를 가릴 수는 없다.

 

헌데 그랬던 故 김학순 할머님은, 1,997 12 16日 자신이 평생 모은 돈

1,700만 원을 ‘ 자신보다 더 불우한 ’ 이웃들에게 써 달라는 유

언을 남기시곤, 이 한많은 세상을 훌훌 떠나셨었다.

 

지금까지도, 자발적 매춘이니 · 북한의 스파이들이니 · 보상금에 눈 먼 사기꾼들이

니 하면서 위안부들을 모독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허당을 입증하고,

뺨을 모질게 때린 한 할머님의 고귀한 죽음이셨었다.

 

해서 故 김학순 할머님의 폭로 이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조직

되기 시작한 수요 시위가 1천 회를 맞았다.

 

그리고 일본 대사관 앞에는, 대사관 앞을 바라보는 소녀상이 세워졌었다.

유독 추웠던 이번 겨울, 소녀상에는 누가 놓고 갔는지도

모를 목도리가 둘러지고 · 담요가 덮어졌었다.

 

부디 저승에서 故 김학순 할머님이, 그 손길들에서 온기를 느끼셨기를 … .

 

아니 역사는,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할퀴며 지나 갔지만, 그러나

입은 사람들은 그렇게 다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검진 가는, 위안부들

 

위안소 설치 목적 중의 하나가, 성병 예방이었던 만큼 위안소와 위안부들의 위

생에 대한 군의 통제는 엄격했었고, 이와 관련된 규정도 많았었다.

 

성병 검진은, 근처 군인병원이나 따로 마련된 진료소

에서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경우가 많았었.

 

군인은, 성병 검사에 합격한 위안부들만 상대할 수 있었다.

불합격한 경우는, 위안소 방 앞에 천 조각을 걸어 말렸었다.

 

흰 천은, 허가하지만 위생구를 사용하라는 의미이고 · 분홍

은 요주의 · 붉은색은 유독한 환자라는 의미였었다.

 

검사에서 떨어지면, 관리들이 싫어할 것을 염려해 자기들끼리 미리 검사하여 이상

싶으면 흙이나 먼지를 묻혀, 군의관들을 더러 속이는 경우도 있었다.

 

  

1,945 오키나와의 일본군 사령부 근처에서, 미 해병 순찰대에 의해 발견된 위안부들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위안부들이 얼마나 귀국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미 상당수가 위안소에서 또는 이동 중에 죽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위안부들은, 미군 수용소에 있다가 귀국하거나 · 많은 어려

을 겪으면서 스스로 귀국했었지만, 위안부를 했었다는 자격지심에

향을 결심하지 못한 채, 현지에서 정착한 사람들도 많았었.

 

위안소 밖까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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