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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13

위안부 증언·사진

by tl3659\0\0 2017. 7. 8.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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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13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 위안부 할머님들의 이야기 - 겹겹

 

 

 

제에 유린된 ‘ 조선의 딸들 ’ 새기고 또 새겨라, 핏빛 절규 

 

‘ 겹겹 ’ 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안세홍 씨가, 일본의 패전으로 우리 한국은

방이 됐지만, 그러나 우리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 남

겨진 일본군 ‘ 위안부 ’ 할머님들의 이야기들을 모아

으로 엮어 출판한,책의 이름이다.

 

겹겹 : 안세홍 사진 ·

서해문집 · 16,000

 

끌려감 · 감금 · 성폭행 그리고 마침내 버려짐으로 이어지는 인생 이야기를 듣기란, 가난과

질병 · 고통으로 무너지고 · 쪼그라든 몸뚱아리를 보는 일 만큼이나 힘들다.

헌데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안세홍 씨가, 우리에게 내민 포토

에세이집 ‘ 겹겹 ’ 은 그 두 가지를 모두 하라 한다.

 

그는, 1,934 ~ 1,942年 사이 중 · 일 전쟁에 이어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중국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쓰이다, 버려진 8분의 여성들을 만나 사진을 찍고, 기록으로 남겼다.

해서 사진도 글도, 고통스럽게 생생하다.

 

녀들, 여전히 중국에 산다.

박서운(1,915 · 2,011사망) 할머님은, 죽는 날까지

자신이 짓밟히던 위안소의 5분 거리에서 사셨었다.

“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속에선 천불이 난다 ” 면서도, 어떻게 ·

디로 가면 살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난한 식민지 나라의 가난한 집안에서 딸로 태어나, 13 ~ 22살의 나이에 선금 몇

백원을 받아 집에 주곤, 일자리 준다는 중국으로 떠나셨었다고 한다.

하지만 속은 걸 알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부터 일본군에게 윤간을 당했, 이후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늘 ‘ 위안부 ’ 란 호칭과, 일본 이름이 따라 붙었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자, 군대가 떠난 중국 벌판에 남겨졌었다.

 

김순옥(90) 할머님은, “ 전쟁이 끝나고 소련군이 들어오자, 그들에

잡히면 또 당할까 싶어 도망 다녔다 ” 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 김순옥(90) 할머님은 살기 위해, 그곳의 남자와 결혼했지만 의처증이 심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만난 남편에게, 하도 맞아 한쪽 시력을

잃으셨다던 故 김의경 할머님.

 

故 김의경(1,918年 생 · 2,009年 사망) 할머님은, 남편에게 맞아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었다.

북한도 · 남한도 그녀들을 깡그리 다 잊었고, 우여곡절 끝에

만난 가족에겐 오히려 상처만 받았을 뿐이었다.

 

안세홍 작가의 ‘ 겹겹 ’ 프로젝트는, 한국 · 중국 · 필리핀 · 대만 · 인도네시아 · 일본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록하고, 사진전 · 강연회 등을 여는 작업이다.

 

안세홍 작가, 서문에서 “ 태평양 연안 나라들과 일본 여성들까지 일본군에게

권을 유린 당했고, 아직도 고통속에 살고 있다 ” 라고 밝혔다.

 

해서 피해자들의 오늘을 찍은 사진에는, 진한 빈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아니 어디서부터가 고통이고, 그 고통의 끝이 어디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최근, 일본의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 국가의 의지로 조직적 납치 · 인신매매

했다는 증거가 없다 ” 라는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지만, 얼마 전 일

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이 기록된 버마 · 싱가포르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까지 발견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확실한 것은, 이렇게 피맺힌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이 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우리는 꼼꼼히 듣고 · 보아야 한다.

이 책에 등장한 8, 6분이 사망하셨다.

남은 두 분의 연세가, 이미 아흔이시다.

임지선 기자 · sun21@hani.co.kr

 

 

흑백으로 찍은 사진들의 모음집인 ‘ 겹겹 ’ 의 책속엔, 중국 거주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1. 충북 진천이 고향이라는 故 박대임(사망 연도 미상) 할

머님은, 늘 한국 지도를 들여다 본다.

2. 故 박서운(2,011年 사망) 할머님이, 어둡고 눅

눅한 방에서 피를 토한 뒤 누워 있다.

3. 김순옥(90) 할머님의 등 뒤로, 한평생 의처증으

아내를 힘들게 한 남편이 보인다.

 

피를 토하고 눈을 잃어도 … , 한국 지도 매만진 할머님들

 

중국 난징까지 갔는데, 중간중간 역에 정차할 때면 일본 군인

들이 들이닥쳐 여자들을 끌어내려 윤간을 했다.

저항을 하고 · 일부는 도망쳤더니, 군인들이 총을 쐈다.

올해로 8·15 광복, 68주년이다.

35동안의 일제 식민통치를 벗어난, 그렇게나 오래 되었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이 휩쓸고 간 땅에서, 아픈 것을

아프다고 제대로 말하지도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전쟁터로 끌려가, 일본군에게 유린당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풀리지도 못한 채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다.

 

중국에 버려진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록한, 포토 에세이 ‘ 겹겹 ’ 의 페이지

마다 보이는 깊은 주름 · 쪼그라든 몸뚱어리, 그리고 결국 사망

하고 말았다는 그 기록은 무심한 시간의 결과물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안세홍 씨는, 2,001年 중국에 남겨져 있는

조선 출신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존재를 알았다.

 

 

이수단 할머님

 

그 해,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둥닝현의 오지 시골 마을에서 故 이수단(90) 할머

님을 만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지난 해까지 태평양 전쟁의 최전

곳곳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을 만나고 다녔었다.

 

한 사람에게 두 번 · 세 번 찾아가 사진을 찍고, 그의 삶을 되물어 기록했었다.

10여年 사이, 여섯 분이 돌아가셨고 이제 두 분이 남았다.

해서 책으로 정리해,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출간했었다.

하지만 고통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난은 오래 피해 여성들을 짓눌렀고, 남성들은 그녀들

짓밟았으며 · 질병은 늘 몸을 지배했다.

일자리를 준다는 말에, 어린 나이에 선금을 받아 가난한 가족에게 주곤 멀리 중국

까지 일을 나갔던 여성들은,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살아야만 했었다.

 

故 김의경(1,918 ~ 2,009) 할머님이, 버려진 중국의 우한 지역은 여름이면 섭씨 40

도를 넘는 기온에다 · 높은 습도로 인해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곳이다.

그녀의 고향은 경성, 지금의 서울이다.

스무살이던 1,938, 혼자 집에 있는데 군복 입은 사람들이 들이

닥쳐 “ 이제는, 여자도 군인으로 나가야 한다 ” 했었다.

해서 부모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로 끌려나와, 다른 여자

여덟 명과 함께 중국행 기차를 탔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기차는 달렸었다.

그러다 난징까지 갔는데, 중간중간 역에 정차할 때면 일본 군인들이
들이닥쳐 여자들을 끌어내려 윤간을 했었다.

 

저항을 하고 · 일부는 도망쳤더니, 군인들이 총을 쐈었다.

그렇게 끌려간 난징에서, 1년 동안 ‘ 아카리 ’ 란 이름으로, 그 이후론

군인의 트럭을 타곤 이동해 후베이성 이창과 창사에서

6年 동안, 모두 7年을 위안부로 살았었다.

 

게다가 검사도 하지 않고, 무조건 강력한 성병 주사인 일명 ‘ 606호 ’ 를 맞

아야 했고, 해서 故 김의경 할머님을 비롯한 여성들은 불임이 됐다.

 

이수단 할머님

 

우한 지역의 한커우 적경리 지역만 해도, 위안소가 20곳이 있었다.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이 지역을 벗어나진 못했다.

1,992, ·수교 뒤 한국 정신대 연구소가 이

곳에서 찾아낸 피해 여성만 10명이 넘었다.

 

1,970年代에는, 북한이 피해 여성들에게 해외 공민증을 만들어 주고 · 학습을 지원

하는 등 활동을 벌였었지만, 80年代 들어서는 그마저도 딱 끊겨버렸다.

 

해서 故 김의경 할머님은, 낯선 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곳 남자와 결혼을 했

었지만, 매일같이 두들겨 맞다가 한 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아버렸다.

 

배삼엽(1925 ~ 2011年) 할머님은, 1,937年 월경도

하기 전인 열세살에 위안부로 끌려갔었다.

아니, 부모를 잃은 직후였었다.

해서 만주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군복 입은 남

자의 말만 믿곤 선뜻 따라 나섰었다.

선금 400원은, 여동생의 중국행을 적극 권했던 친오빠가 챙겨 갔었다.

12명의 여성이, 중국 네이멍구 바오터우까지 동행했었다.

 

물론 배삼엽 할머님이, 가장 어렸었다.

하지만, 아사히칸이란 이름의 위안소에 들어서고나서야 속았다는 걸 알았었다.

처녀라서, 첫 관계를 한 장교가 위안소에 큰돈을 지급

했다는 기막힌 이야기를 훗날 들었었다.

그 날 이후, 배삼엽 할머님은 일주일 동안 피를 쏟았었다.

 

그리고 3년을 위안소에서 보낸 뒤, 배삼엽 할머님의

목구멍에선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었다.

그러자 배삼엽 할머님은, 쫓겨나 부산 이모 집으로 돌아왔었다.

하지만 이미 조카 역시, 위안부로 끌려간 뒤였었다.

헌데 부모 없는 한국에서, 가난은 견디기 힘들었었다.

 

해서 다시, 중국으로 갔었다.

톈진과 베이징의 춤방에서, 춤을 췄었다.

손님은 대부분, 미군이었다.

그러다 1,958, 박스 제작 공장에 취직한 것은 배삼엽

머님의 인생에서 매우 운좋은 일에 속한 거였었다.

 

스무살에 중국 지린성 훈춘시 춘화진에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해야만 했었던 故 박

서운 할머님(1,915 ~ 2,011年)죽을 때까지 그 동네에서 사셨었다.

가난한 집, 입이라도 하나 덜기 위해 열아홉에 시집을

가 시집의 집안 일과 농사 일을 다 했었다.

그러나 1년 만에 소박을 맞아, 친정에도 못 돌아간 채 식당을 전전

하다 선금 300원을 받아 친정에 주곤 만주로 떠났었다.

 

허드렛 일이나 할 줄 알았는데, 아니였었다.

성병이 심해져 군인을 받지 못하자, 위안소에서는 밥조차 주지 않았었다.

해서 구걸을 하여, 간신히 목숨을 이었었다.

형편이 그렇다 보니 한족과 조선족 남자 세 명과, 살고 · 헤어지기를 반복했었다.

무너진 벽, 눅눅한 이불 위에 누워 故 박서운 할머님은 “ 몸을

너무 굴렸다 ” 라며 “ 창피하다 ” 라고 했었다.

 

안세홍 작가는, “ 할머니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사진을 찍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없어 자책했다 ” 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위안부 피해 여성과, 그녀들의 기록을 남긴 작가라 더 부끄럽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전후 일본 정부도 · 남한도 · 북한도, 피해 여성들을 위해 한 게 별로 없다.

 

해서, 그녀들은 묻고 있다.

부끄러워 해야 하는 건, 과연 그 어느 누구일까  ?

해서 겹겹으로, 여전히 부끄러운 시대이다.

 

 

 

사진작가 : 안세홍

 

그는 1,971강원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중학생 때부터 탈춤 사진을 찍기 시작해, 장애인 · 일본군 위안부 · 인권운동

사회 소외계층을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해 왔다.

또한 사진의 정신적 바탕을 찾기 위해, 무속 · 불교 · 민속 등 전통문화를 찾아다녔다.

지금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샤머니즘을 다룬 사진 작업을 심도 깊게 진행하고 있다.

아울러 일본 12개 도시를 비롯해, 뉴욕 · 파리 · 베를린 · 서울 등 세계 주요 도시를 돌며 일본

군 위안부 사진전 · 강연회 · 역사기록을 위한 ‘ 겹겹 프로젝트 ’ 를 진행하고 있다.

 

故이수단 할머니의 건강했던 한 때. 이 할머니는 경로원 방 한 켠을 좋아하는 사진들로 장식했다. 안세홍 사진작가

  

故 이수단 할머님이, 생존해 계셨을 때의 모습.

故 이수단 할머님은 생존시, 경로원 방 한 켠을 좋아

하는 사진들로 장식해 놓으셨었다고 한다.

 

 

 

우리 것을 잊지 않기 위해,아리랑을 부르고 · 한복을 입으며 지내시는,

중국 거주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의 모습.

 

 

대부분의 할머님들에겐, 가족이 없다.

흑룡강성 오지에 사셨던 故 이수단 할머님 역시도, 가족 없이 양노원에 혼자 사셨

지만, 하루에 식사가 두 번만 제공될 정도로 양노원의 환경은 열악했다.

 

 

기본 프로젝트 커버 이미지 

 

이수단 할머님과, 이제는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신 옛 동료였던 김순옥

할머님이, 이제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아 허허벌판인

안소 터를 찾아, 걷고 있는 생전의 모습.   ⓒ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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