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김순옥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10
중국에서 거주하셨던, 일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김순옥 할머님의 증언
나는 1,922年 생으로, 평안남도 평양이 고향이다
오빠 둘에 언니 하나, 그리고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평양 모란봉 앞에, 집이 있었다
가난하여 콩으로 배를 채우고, 죽을 쑤어서 먹을 때가 많았다
집안이 어려워, 7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했었다
일본사람 집에서 아기를 돌보아 주며, 7年동안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었다.
18살 때, 중국 요녕성으로 가게 됐었다
봉천에서, 자동차를 타고 반나절을 달려가서 내렸는데 함께
온 조선 사람이 나를 중국 사람에게 판 거였다
거기는 술집이었는데, 밤이면 자꾸 손님을 받으라고 강요했으나 내가 거절했었다.
거기서 치마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술집에 온 60대 조선노인이
안됐다고 하면서, 자기 집에 데려다 먹여주기도 했었다
반 년 후에, 그 노인이 빚을 물어주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게 됐었다.
집에 돌아온 후, 다시 신의주로 팔려가서 40대 주인의 양딸이 됐었다
거기서는, 기생으로 등록하여 영업을 했었다
나는 인물이 곱고 노래도 잘해서, 손님들에게 제법 인기를 끌었다
1年 반 동안, 빚을 다 갚고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 때 아버지는, 여러 가지 노동일을 했었다
구두 고치는 일 · 국수 공장 일 · 짐꾼 등, 막노동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식구가 많아서 먹고 살기가 늘 힘들었다.
20살 때, 다시 팔려서 중국의 동녕으로 가게 됐었다
어떤 조선 남자가, 공장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여
여자들이 한 30 ~ 40명 쯤 같이 가게 됐었다
그때는,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갔었다.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따라 갔는데, 평양에서 기차 타고 중국의 목단강
에서 내리니까, 일본 군인들이 막 우글우글해서 깜짝 놀랐었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다시 동녕까지 들어갔었다
처음, 그곳에 끌려가서는 그저 매일 울기만 했었다
너무 무섭고 겁이 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도 몰랐다.
현지 생활
위안소에서 한 방에 한 사람씩 방을 주는데, 관리하던 사람은 조선 사람이었다
평양에서 우리를 데리고 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집엔 간판도 있었지만, 나는 글씨를 몰라서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 모른다.
거기에는, 일본 군인들만 왔었다
군인들이 표를 사가지고 왔는데, 하루에 한 여남은 장씩 표가 들어왔었다
군인이, 주인한테 표를 사와서 여자에게 주면 저녁에 모아서 주인
한테 가져가, 오늘 얼마 받았나 계산을 했었다
밥은 주인이 주고, 옷과 화장품은 여자가 다 사는 거였다
가까이에 있는 군대병원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를 받았었다
만약에, 병이 있으면 문 앞에 써 붙이곤 군인들을 못 받게 했었다
의사도 군인이었고, 다 일본 남자들이었다.
병이 심하게 든 사람은, 병원에서 많이 맞기도 했었다
병이 있으면 손님을 못 받으니까, 주인이 마구 때렸었다
집에는 목욕탕이 있어서, 손님 받으면 목욕탕 가서 씻고 빨간 약물로 씻고 했었다
군인들은, 모두 사쿠(콘돔)를 끼게 되어 있었다.
위안소가 두 집 있었는데, 두 집 모두 조선 여자들이 있었다
故 이수단(중국에서 거주하시다, 사망하셨음)은 앞 집에 있었고, 故 지돌이와는 같은 집에 있었다
집은 달랐지만, 그저 짬이 나면 서로들 만나서 같이 앉아 울고 그랬었다
군인을 적게 받은 여자는, 차별을 받아서 주인에게 욕먹고 · 얻어맞기도 했었다
술 잔뜩 먹고, 개망태기처럼 못 되게 구는 졸병들이 가끔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인물이 예뻐서, 별이 세 개나 · 네 개 되는 장교를 상대했었다
그의 숙소에 가서 머물기도 하고, 그러다가 임신을 했었다
임신 5개월쯤 됐을 때, 그 장교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됐었다
그는, 나에게 빚을 다 갚아 줄테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두촌으로 가서 셋방을 하나 얻어 아이를 낳았었다
그 아이는, 중국 사람에게 키워 달라고 주었었다
집에 갈까 고민을 하다가, 석문자 위안소로 갔었다.
석문자는 조그만 동네였지만, 부대는 많았었다
석문자 위안소에는 여자들이 한 삼십 명이 있었는데, 그 근처에는 그런 집이 많이 있었다
조선인 집이 두 집, 일본 여자들이 있는 집해서, 그런 집이 열 집쯤 있었다
그 집의 관리인은 일본인이었고, 여자는 조선여자였었다.
석문자에서, 군의의 눈에 들어 또 임신을 했었다
너댓 달 쯤 있다가, 위안부를 그만 두고 그냥 주인집에 있었다
주인은, 아이가 없어 아이을 낳은 뒤 주인에게 주었는데 다섯 달 만에 죽었다.
나는 인물이 좋아서, 주로 장교만 상대했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 보다는 그래도 좀 나았다
자기 신세를 슬퍼하다가, 자살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오줌 누러 간다고 산에 가서, 목매고 죽은 경우도 있었다.
또 한 여자는, 아이가 둘인데 남편이 팔아먹어서 위안소로 온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면서, 늘 울고 그랬었다
다른 여자들이 벌어서 빚을 물어 줘, 그 여자는 집으로 돌아갔었다.
해방 후 상황
전쟁이 끝난 뒤, 소련군이 들어오고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았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짐을 꾸렸는데, 부대에서 전화
가 와서 내일 아침에 피난을 가라는 거였었다
이미, 자동차에 짐을 실어 떠나보낸 후였다
해서 짐은 가고 사람은 같이 못 가, 결국 그 짐은 다 잃어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조선 사람들을 따라 피난을 다녔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동녕과 춘화 사이 노흑산에서 길이 막혔었다
소련군이, 길을 막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두촌에서 17리쯤 떨어진 태평촌으로 가서 조선족 집의 다락에 숨었었다.
그때 친일파였던 조선인 최문호라는 사람이, 친러파가 되어 여자들을 소련군에게 대주기로 했었다
그래서, 여자들을 외부로 내보내지 말라는 지시가 내렸던 거였었다
소련군이 덤벼들까 봐,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중국인 집에 들어갔었다.
어느 날은, 일본 사람이 쓰던 집에 숨어있는데, 소련군 세 사람이 들이닥쳤었다
그들에게, 고춧가루를 확 뿌리곤 가까스로 도망쳤었다
나중에 팔로군이 들어와서 최문호를 총살하였고, 우리 여
자들이 가서 그걸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일본군은 모두 달아나고, 중국군이 들어온 이후 우리 여자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서 자기 살 길을 찾아야만 했었다.
현재 생활
당시 그 지방에는, 땅이 척박하고 인구가 많은 산동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왔었다
24살에, 먹고 살기 위하여 산동 사람과 결혼했었다
딸 둘 ·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아들이 죽은 뒤 이혼하고 혼자 동녕으로 갔었다
아들이 병들었을 때, 약값 10원도 빌려오지 못하는 남편의 주변
머리 없음에 절망하여, 이혼하여 딸 둘을 낳았었다.
그러나 그 前 남편은, 2,004年 말에 사망했었다
前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는, 의처증이 심해서 외부에서 오는 전화를 받기도 힘들었었다
지금 함께 사는 아들은, 데려다 기른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가 있는데, 아주 공부를 잘한다.
아들이 노름을 하는 등 생활에 불성실하여, 며느리는 손자가 공
장같은 데서 일하며, 한 달에 600원쯤 번다
요즘 다리가 아프고 · 고혈압 증세가 있는 것 외에, 마음은 편하다
죽기 전에, 한국에 나가 조선 땅을 한 번 밟아보는 게 소원이다.
나눔의 집에서의 생활
헌데 중국에서 거주하셨던 김순옥 할머님께서, 여성 가족부와 정신대 연구소의 중
국 거주 일본군 종군 ‘ 강제 위안부 ’ 피해자 국적 회복 지원 사업으로,
2,005年 12月 10日, 영구 귀국해 나눔의 집에 들어오셨었다.
처음 한 동안 김순옥 할머님은, 낯선 환경에서 중국에 두
고 온 가족들 생각에 눈물을 많이 흘렸었다.
다행히 2,006年 여름, 딸이 한국에 들어와 나눔의 집 근처 식당에서 일을 하게 돼,
할머님은 이제 나눔의 집을 당신의 집처럼 생각하며 지내고 계신다
가끔, 딸이 있는 곳에 가 주무시고 들어오실 때도 있다.
노래를 좋아하셔서, 매일 방 안에서는 트로트가 끊임없이 흘러나오
고, 자원 봉사자들이 오면 할머님은 방 안에서 나올 생
각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좋아하신다.
김순옥 할머님의 건강 상태는, 혈압에 · 만성변비가
있으나, 전체적으론 양호한 편이시다.
중국에서 거주하시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김순옥 할머님.
2,005年 12月 10日 오후, 인천 공항에 도착한 김순옥 할머님이, 입국
장에 마중 나온 관계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경기 광주 퇴촌면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김순옥
할머님(94세)이 병상에 누워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
‘ 강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 이사 축하해요 ’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이,
할머님들을 위해 새로 지은 요양 시설로 이사를 시작했었다.
일본인 자원 봉사자, 이시즈카 카요코(22 · 여 · 오른쪽) 씨와 오무라 케이(32 · 여 · 왼쪽) 씨가
새 숙소에 마련된 방에서 김순옥(87) 할머님의 손을 잡고 이사를 축하해 주고 있는 모습.
최고령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박옥련 할머님이 사망하신 뒤, 최고령 위안부가 되신
김순옥(90) 할머님이,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 복도를 걷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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