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님의 그림 - 고향집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7
위안부, 증거 있다
15살 소녀, 日 헌병에게 끌려가는 동안 엄마는 …
누구에게도, 위안받지 못한 그녀들의 악몽
진경팽, 일본군의 ‘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 할머님의 증언
만 열다섯 살인 1,939年, 추석을 지낸 지 얼마 안된 어느 날이었었다.
그 날도 엄마와 함께 목화를 따는데, 작은 군용차를 타고 빨간 완장을 찬 일본 헌병 4명이 나타났었다.
겐삐(헌병)들은, 내가 모르는 일본말로 몰아세웠었고, 난 무서워서 반항도 못하고 “ 엄마! ” 만 외쳐댔었다.
엄마가, 겐삐의 다리를 붙들고 “ 우리 애기를 데리고 가려면, 날 죽여놓고
가라 ” 고 하자, 겐삐는 발로 엄마를 사정없이 내리찍었었다.
엄마는, 밭을 구르면서 휘뜩 자빠지셨었고, 그 것이 엄마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비극은, 도처에서 찾아왔었다.
목화를 따던 가을에도, 동짓달에도 헌병들은 집과 학교를 가리지 않고 덮쳤었다.
1,937年, 난징 점령 과정에서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과 강간을 자행한
일제가 국제 사회의 맹비난을 받던 시점이었다.
1,932年, 만주에 일본군 위안소를 설치한 일제는 전쟁이 장기전에 돌입하자 강간과 성병
등 군내 성 문제를 체계적으로 관리한다며 위안소를 확대했었다.
누구에게도, 위안받지 못한 위안부들의 기구한 삶은 그렇게 어긋나기 시작했었다.
김분선, 일본군의 ‘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 할머님의 증언
강제동원 방법은, 다양했었다.
폭력과 협박은 예사였고, “ 돈을 벌게 해 주겠다 ” 며 취업사기를 치는 일도 빈번했었다.
김분선 할머님은, “ 일본 사람이 ‘ 옷도 고운 것 입고 · 공장에 취직시켜 줄 테니 나물
뜯으며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된다 ’ 고 하며 데려갔다 ” 라고 증언했었다.
1,992年, 우리 정부의 위안부 실태조사에 참여한 한 피해자는 “ 1,938年 일본의 놋그릇
상납 요구와 창씨 개명에 반대한 아버지가 연행됐었다.
애국 봉사대에 지원하면 아버지가 풀려날 수 있다고 해서 지원했더니,
곧바로 종군 위안부에 끌려갔다 ” 라고 증언하기도 했었다.
문옥주 · 이옥분, 일본군의 ‘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 할머님의 증언
위안부의 생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문옥주 할머님은, “ 방에는 이불 하나와 요 하나, 베개 둘이 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중국 동북부 도안성은 춥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면서
“ 하루에 20명 내지 30명은 상대했었던 것 같다 ” 라고 했었다.
이옥분 할머님은, “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아침 아홉 시부터 밤 열두시까지 받았다 ” 라고 증언했었다.
종전은, 위안부 생활의 끝이 아니라 또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일본군은, 위
안소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위안부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거나 유기했었다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수치심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대신 현지에 남는 길을 택한 사람도 많았었다
가까스로 고국에 돌아간다 해도, 되돌아 오는 것은 ‘ 몸 팔러 갔다 왔다 ’ 는 멸시 뿐이었다.
가네다 기미코(金田君子) 할머님의 증언
1,992年 6月 1日, 도쿄 지방 재판소에서 ‘ 가네다 기미코(金田君子) ’ 라고
자신을 소개한 할머님 역시, 그런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피해 보상 청구 소송에서
증인으로 나선 이 할머님은, 유일한 생계 수단인 파출부 일을 할 수 없게 될까
봐 가발에 선글라스를 쓴 채 가명으로 증언대에 서 이렇게 말했었다.
“ 자식도 낳을 수 없고 · 결혼도 못하고, 평생 오 갈 데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몸도 마음도, 아편으로 썩었다. 일본땅을 다
줘도, 내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 청춘을, 돌려달라. ”
당시 위안부는, 네덜란드인 100여 명과 대만인 등 최소 5만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렀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우리나라 위안부 피해자는 61명이다.
원문 출처 : 서울신문 · 배경헌 기자
버려진 女人들은, 미군 포로 수용소에 수감됐었다
태평양 전쟁 중 때, 미군에 의해 구출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