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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1

위안부 증언·사진

by tl3659\0\0 2017. 5. 1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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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하면서, 위안부 막사에수류탄을 던져 집단 폭살시킨 일본군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들의 증언 · 사진들 - 이토 다카시

· 사진 : 이토 다카시(伊藤孝司)

 

 

 

이토 다카시(伊藤孝司 · 1,952年生)

 

이토 다카시는, 포토 저널리스트로 과거에 일본이 행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피

해를 입은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그리고 현재 일본이 저지르는 지구환경

파괴 현황을 아시아 각지에서 널리 취재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시아의 피해자에 관한 저서를, 일본에서 8권 · 한국에서 3권(눈빛 출판사에서 종군 위안

부 · 사할린 아리랑 환경에 관한 저서를 일본에서 2권 출판했었다.

일본 · 미국 · 유럽에서 수십 차례의 사진전을 열었으며, 96年에는 서울과 부산에서도

사진전인 ‘ 깨어진 침묵 - 아시아의 종군 위안부들 ’ 을 열었었다.

 

하지만, 일본 우익들의 테러 위험에 대한 본인의 우려에

 따라 얼굴 사진은 싣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이 행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커다란 피해를 받은 한국인들은 일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 그 실태조차 거의 알려진 바 없다.

나는, 올해 5月에서 6月에 걸쳐 평양에 19일간 체류하면서 많은 피해자들을 취재했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전() 일본군의 ‘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 ’ 여성

들의 증언과, 그들의 몸에 깊이 새겨진 상흔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었다.

 

나는 전후 세대 일본인이지만,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행한 침략의 실태를 일본 사회에

알리는 것이 일본인 사진작가이자 · 저널리스트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때문에, 십수년 간에 걸쳐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방문해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 600여 명을 찾아가 취재했었다.

 

그런데, 취재하지 못하고 공백으로 남아 있던 곳이 북한이었다.

해서 취재 교섭을 시작한 것은 1,990年, 것이 올해 4月 겨우 허가가 났었다.

헌데 북한에선, 일본인 저널리스트의 단독 취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수년만의 일이라 했었다.

 

니가타에서 승선한 배는 5月 17日 원산항에 입항했었고, 나는 약 80

kg촬영 기재들을 둘러메곤 부두에 내렸었다.

해서 19일간 평양에 머물면서, 내가 바라던 바를 거의 다 취재할 수 있었다.

 

전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사람들 · 강제연

행돼 동에 종사한 사람들 · 징병으로 군인이나 군속이 된 사람들 · 불교도

로서 탄압받은 사람들까지 모두 21명을 만났었다.(중략)

 

임신하자낙태시킨다고 자궁 들어내

 

북한에서, 전()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을 취재하는 것은 일본

인으로서, 더욱이 남성으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

도의 끔찍한 육체적 상처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것은, 민족 차별과 여성 차별 위에 일본군이 만들어낸 종군 강제 위안부

제도의 본질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기도 했었다.

 

정송명,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할머님의 증언

 

등의 칼자국을 보여준 분은, 버마에 연행됐었던 정송명(鄭松明 · 1,924年生) 할머님이셨다.

“ 조선인 여성 400명 중, 절반은 싱가포르에서 하선하고 나머지는 랑군으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한 달이나 걸려 타이까지 걸어왔습니다. 위안부 45명과

남성 15명의 조선인이 2척의 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그의 등에는, 지금도 선명한 상처가 두 곳이나 남아 있었다.

 

“ 너무 피로해, 더 이상 상대 못하겠다고 하자 ‘ 마에다 중위 ’ 가 일본도를 뽑아 내리쳤습니다.

심한 상처인데도, 약 한 번 발라주지 않아 2년 간이나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

 

유선옥,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할머님의 증언

 

유선옥 할머님의 배에는, 배꼽 위 쪽에서 아래 쪽까지 크고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군의관이, 자궁째 태아를 들어낸 수술의 흔적이란다.

유 할머님은, 1,923年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고 했었다.

기장밥을 끼니로 할 정도의 빈농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미야모토가 공

장의 일자리 이야기를 해 주었고, 그는 주저없이 따라 나섰다고 했었다.

 

해서, 다른 여성 2명과 함께 끌려간 곳은 중국 동북 지방의 목단강.

그러나 따라온 걸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그리하여 다케코라는 이름이 붙여진 소녀는, 처음엔 하루 5 ∼ 6명 정도

· 많을 때는 15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고 했었다.

기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면 다시 군인들이 덮쳐왔었다.

불행히도 임신을 하게 되자, 낙태 겸 재임신 방지를 위해 태아가 있는 자궁을 들어내더라고 했었다.

 

상처가 낫자마자, 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만 했었다.

“ 반항하면 죽여버립니다. 미쓰코라고 불리던 소녀는, 목을 쳐 죽였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15명 정도의 여성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5 ∼ 6명 정도

였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뒤에도 거지같은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年 10月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1,981年에 사망한 남편에게도, 제 체험을 끝까지 고백

하지 않았습니다. ” 라고,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했었다.

 

“ 지금도, 몸서리치는 증오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일본에

대해 복수하는 일에만 골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때의 군인을 찾아낸다면 찔러 죽이고

싶어요 ” 라고 말하곤, 그 때부터는 내 질문엔 거의 대답하진 않았었다.

아니 일본인과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는, 그녀의 기분을 뚜렷이 읽을 수 있었다.

 

이경생,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할머님의 증언

 

이경생(李京生 · 1,917年生) 할머님의 배에도, 유 할머님과 비슷한 상처가 있었다.

지주집에서 일하고 있던 이 할머님은, 끈으로 묶인 채 경상남도 창원의 군수 공장으로 끌려갔다고 했었다.

“ 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 ” 라고, 장교가 말했다고 했었다.

 

하루 밤에, 10 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만한데 라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내더라고 했었다.

“ 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여성을 성욕 처리의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낙태와 불임 시술로 자궁까지 들어내는

행위는, 여성의 존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

 

산 사람을 삶, 강제로 먹이기도

 

故 정옥순(鄭玉順) 할머님의 기억도, 매우 또렷했었다.

故 정 할머님은,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豊山郡 把撥里)에서 1,920年 12月 28日에 태어났다고 했었다.

1,933年 6月 3日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 3명에게

연행됐고, 끌려간 파발리 주재소에서 강간당했었다.

 

저항하다가 눈을 세게 얻어맞아, 그 때부터 왼쪽 눈이 차츰 안 보이게 됐었다.
그 뒤, 10일이 지나 7 ∼ 8명의 군인에 의해 트럭에 실려

산(惠山)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연행됐었다.

그 곳에는, 각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故 정 할머님은, 하루에 약 40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상대한 일도 있어 자궁 출혈이 심했었다.

 

 그 해 827, 칼을 찬 군인이 “ 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 ” 라고 물었었다.

그 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었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들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었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었다.

 

그 때의 기분을 “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진 것 같았다 ” 라고, 할머님은 표현했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었다.

故 정 할머님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 위안부

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운다 ” 라고 했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솥에 넣어 삶았었다.

그리곤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었다.

 

故 정 할머님은, 그 때 피살된 여성들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한 사람씩 짚어나갔었다.

중도에서 헷갈리면, 다시 처음부터 세어나갔는데 아무리 해도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자 몹시 서운해 했었다.

그 수비대의 대대장은, 니시하라 · 중대장은 야마모토 · 소대장은 가네야마

였으며, 위안소 감독은 ‘ 조선인, ’ 이었다고 했었다.

 

매독 감염 숨겼다고, 달군 철봉을 자궁에

 

1,933年 12月 1日에는, 한 여성이 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 죽여버렸었다.

다음 해 2 4日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됐었다.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너무나 지독한 일본군의 잔학 행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된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갔었다.

질문도 못하고, 한숨만 내뿜었었다.

하지만, 놀라운 이야기는 계속됐었다.

 

혜산의 부대는,정 할머님을 포함한 여자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이동해 대만에서 가까운 곳

얼마동안 있다가 1,935年 9月에 광둥(廣東)에 도착, 이듬해 6月 15日 故 정 할머

포함12명의 여성이 도망쳤는데, 이틀 후 모두 붙잡히고 말았었다.

“ 맨처음 도망치자고 제안한 자를 가르쳐 주면, 주모자 이외는 모두

살려주마 ” 고 했으나, 아무도 고해 바치진 않았었다.
정 할머님은, 철봉으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았었다.

그 때의 상처는, 그 때까지도 남아 있었다.

다음에는, 물고문을 당했었다.

 

고무 호스를, 입에 넣고 물을 틀어댔었다.

부풀어 오른 배 위에 판자를 올려놓곤, 군인들이 올라 서선

널 뛰기 하듯 뛰자 입에선 물이 뿜어져 나왔었다.

그런 일이 몇번인가 되풀이 되자, 기절하고 말았었다.

그러자, 더욱 더 잔인한 행위를 했었다.

 

故 정 할머님과 여자들의 발목을 끈으로 묶어 거꾸로 매달아 놓고선, 바늘이

두룩하게 박힌 검은 몽둥이를 들고 와 먹물을 바른 뒤 故 정 할

머님다른 여성들의 입속에 몽둥이를 쑤셔넣었었다.

故 정 할머님은, 앞니가 부러지고 격렬한 통증으로 기절했었다.

 

문신을, 온몸에 걸쳐 새겼었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들에게 문신을 새겼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 명을 옮겨 약 두 달간 간호해 줬었다.

해서 故 정 할머님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라며 의자에

앉아 있는 내 팔을 꽉 쥐며 울부짖듯 소리 질렀었다.

눈 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했었던 일본

병사와 겹쳐 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 줬었다.

故 정 할머님이, 손가락으로 뒤집어 보인 입술 안 쪽엔 선명하게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었다.

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었기 때문에, 그 뒤로는 말하기도 곤란

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었다.  

등 아래 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었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서 했음이 분명했었다.

 

‘ 내선 일체 ’ 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었다.

故 정 할머님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들을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

지른 식민지 지배의 실태와 천황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난징대학살 때, 女人의 하의를 벗겨 놓은 채 사진 찍으며 희롱하는 일본군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인, 故 정옥순(鄭玉順) 할

머님의 에 새겨진 문신.

 

 

1,945 88, 미얀마의 양곤에서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와

유엔 병사가 공중변소 앞에서 대화하고 있는 모습.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희롱하는 일본군

조선 처녀는, 치욕에 어쩔 줄 몰라 얼굴을 가리고 있다.

 

 

난징대학살 때 女人을 강간한 후, 이렇게 음부를 총 ·

으로 쏴거나 · 찔러 죽인 일본군.

 

 

사진이 안보일 때→우측클릭→'사진보기' 클릭OK. ☞작성: Daum카페: 한국 네티즌본부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박옥선 할머님의 그림

위안소에서, 매우 춥고 · 울면서 지냈었던 기억을 되살려 그렸다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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