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김선이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6
일본군들이, 女人을 겁탈하는 장면
일본군들이, 女人에게 스스로 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장면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서, 한 할머님이 일본의 위안부 왜곡 광고에 항의하고 있다.
2,011年 3月 16日, 일본군의 종군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이 서울 중학동 주한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961차 ‘ 수요시위 ’ 를, 일본 대지진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추모 침묵 시위로 대신해 진행하고 있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피해 위안부 할머님들의 외침, 힘내세요!
2,011年 3月 16日, 일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이 16日 정오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 961차 수요집회에서, 이옥선 할머님(8
4)이 일본 국민들을 향해 “ 힘내세요! ” 를 외치고 있다.
2,011年 3月 16日,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이 정오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 961차 수요집회에서, 일본 대지진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애도를 표하는 묵념을 하고난 후, 눈물을 닦고 있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피해 위안부 할머님들을 향한 취재 열기
일본 도호쿠 대지진 이후, 연락이 끊겼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송
신도(90) 할머님이 무사히 구조된 것으로 확인됐다.
2,011年 3月 20日, 센다이(仙台) 한국 총영사관 등에 따르면 송 할머님은
미야기(宮城)현 이시노마키(石卷)시 인근 대피소에서 지내다,
지난 19日 대피소를 나와 센다이 시내 지인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뒤 도쿄로 이동했었다고 한다.
영사관 관계자는, “ 대피소에서 나온 송 할머님은, 심신이 피로해
보였지만 건강한 상태였다 ” 고 전했다고 한다.
2,011年 2月 13日 오후, 경기도 광주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이 사는 ‘ 나
눔의 집 ’ 을 찾은 일본 스기우라 세이켄(왼 쪽에서 2번째) 前 법무장관과 한국의
김성호(왼쪽) 前 법무장관이, 피해 할머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들 전 장관들은, 민간 차원에서 역사의 아픈 현장을 방문, 피해
할머님들의 실상을 살피고 아픔을 함께 나눴다.
백희영 여성 가족부 장관은, 2,011年 3月 17日 오후 일본군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이 안장된 충남 천안시 국립 망향의 동산을
방문, 故 김학순 할머님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의 증언
2,007年 6月 15日, 충북 충주시 중산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열린 강제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이, 전국 고등학교 순회 강연회에서 강일출(79)할머님이, 학
생들에게 강제 위안부 피해 실상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이, 2,006年 7月 5日 오전 서울 종로구 가회동 헌법 재판
소 앞에서 “ 외교 통상부가 자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실천을 하지 않아 ‘ 일
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 ’ 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 추구권 등을 침해받았다 ” 라며, 헌법 소원 심판을 청구한 직후 연 기자회견에서 피해 할머
님의 증언을 듣던 김순옥 할머님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美 유학생의, 일본군 종군 강제 피해 위안부 사진 전시회
2,008年 8月 1日에서 5日까지 이중섭 거리 전시대에서, 미 유학
생의 종군 위안부 사진 20여점이 전시됐었다.
전시된 종군 위안부 사진은, 서귀포 출신으로서 미국으로
유학간 이경욱(18세) 학생의 작품이었다.
이 군은 중학교 1학년 때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2년간 유학생활을 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페이몬트 고등학
교 11학년(한국의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이 군은, 종군 위안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종군 위안부에 관한 기사를 접
하고 부터라며 “ 2,007年 여름방학을 이용해 한국의 ‘ 나눔의 집 ’ 을 방문하
며, 할머님들과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 고 말했었다.
이 군은, “ 처음에는, 할머님들이 그냥 궁금했었는데 만남이 거듭될 수록 옆집 할머
님같은 친숙함을 느꼈다 ” 며 “ 연세가 많으신 할머님들께서 남은 여생
을 좀 더 편히 보낼 수 있도록 도와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
어 사진 촬영을 하게 됐다 ” 고 말했었다.
위안소 내의, 오락시간에 동원된 위안부들
위안부들은, 위안소에서 ‘ 하루코 · 게이코 · 노부코 ’ 등의 일본식 이름을 받아서 사용했었다.
군인들은, 위안소를 주로 ‘ 삐야 · 빵빵야 ’ 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위안부들을, 삐(중국어로,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말) 혹은 민족에 따라 ‘ 일본
삐 · 조선삐 · 지나삐 · 대만 쿠냥(처녀) ’ 등으로 불리웠었다.
소화 20年 · 1,945年, 어린 소녀들까지 포함된 도암면 처녀회
‘ 여자 정신 근로령 ’ 에 의해, 근로 협력 명령을 내린 후 조선 각
지에서 일본 경찰들의 지휘로 처녀회가 조직됐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정신대의 이름으로 각 군수공장으로 강제 동원됐었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이순덕 할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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