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모짜르트(Mozart) - 현악 5중주 4번 G단조 K 516
故 Mozart - String Quintet No 4 in G minor K 516
바이올린 1 : 故 아르투르 그뤼미오(Arthur Grumiaux)
바이올린 2 : Arpad Gerecz
비올라 · 알토 1 : Georges Janzer
비올라 · 알토 2 : Max Lesueur
첼로 : Eva Czako
故 모짜르트의 현악 5중주
故 모짜르트(1,756 ~ 1,791)는, 모두 여섯 곡의 오리지널 현악 5중주 곡을 썼었
는데, 현악 5중주를 높은 예술적 가치로 끌어올린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바이올린 두 개 · 비올라 두 개 · 첼로 한 개의 편성으로 중음역에 충실을 꾀했었다.
그리고 이 K 516 작품은 1,787年 5月에 작곡했었는데, 가장 정열적이
면서도 그의 전 작품을 통해 가장 심각한 감명을 주는 곡이다.
천진난만한 신이 낳은 귀염둥이라는 것이, 故 모짜르트에 대한 보편적 생각인
데 반해, 이 곡에서는 절망적인 단념과 운명에의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
같은 운명과의 싸움에서도 故 베토벤의 경우는, 자부와 승리에 넘치는 기백이 엿보이지만
故 모짜르트의 경우는, 자신에 대한 고뇌와 절대자에 대한 귀의가 담겨져 있다.
특히 종악장에 나타나는 인생의 환희는, 故 베토벤의 것처럼 승리를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순수예술의 영역에 안주하려 하고 있다.
또한 이 曲은, 애초부터 이 장르의 작품으로 작곡된 것이 아니라, 이미 작
곡돼 있던 각 2대의 오보 · 클라리넷 · 혼 · 파곳을 위한 세레나데
K 388(384 A)를 작곡가 자신이 편곡한 것이라고 한다.
원곡은, 전체적으로 실내악적인 면밀함에 결함이 좀 있
었는데, 오히려 ‘ 현악 5중주곡 ’ 이라는 울림을
가져, 그 형태가 심화됐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 G 단조 ’ 라는 조성(調性)은 故 모짜르트에겐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이 조성에는 ‘ 숙명적인 우수 ’ 가 깔려 있다.
大교향곡 제 40번과 피아노 4중주곡 중 한 曲이, 바로 이 조성으로 씌어
졌었고, 이 ‘ 교향곡 ’ 의 피날레가, 바로 이 ‘ 현악 5중주곡 ’ 의
‘ 제 1악장 ’ 에서 주요 모티브의 핵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엄숙한 격정이, 한층 강하게 악곡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데, 이는 ‘ 악성 ’
의 환희가 아니라 故 모짜르트적인 ‘ 숙명의 세계 ’ 를 나타내고 있다.
바이올린 연주자, 故 아르투르 그뤼미오
故 그뤼미오는, 이른바 프랑스 - 벨기에 악파라 불려지는 바이올
리니스트 가운데 가장 눈부신 활약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1,921年, 벨기에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의 권유로 4살
때부터 바이올린의 레슨을 받기 시작했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12살 때, 샬로아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2개
부문에서 모두 1등상을 획득하는 재능을 나타냈었다 한다.
해서 그는, 브뤼셀로 가서 이자에의 제자인 알프레드 뒤보아(Alfred D
ubois)의 문하에서 바이올린을 연마했었고, 18살 때 앙리 뷔에
탕 상과 프랑소아 프뤼미 상을 받는 성과를 나타냈었다.
이어서 19살 때의 그는, 정부가 주는 ‘ 대연
주가 상 ’ 을 받는 영광을 안았었다.
그리고 이 무렵의 그는, 故 에네스코에게서도 레슨을 받았었다고 한다.
그러다 1차 대전 당시의 그는,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 여러 도시에서 독주자와 4중
주단의 일원으로 활발한 연주를 했었고, 전쟁이 끝난 뒤엔 미국 · 영국 · 유
럽대륙 · 아시아 등지를 다니며, 주로 독주자로 활동했었다 한다.
그의 연주는, 세련되고 · 표정이 풍부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의 음색은, 둥글고 · 부드럽다.
대단한 테크닉의 소유자이지만, 그는 결코 스스로를
대가연하지 않는 겸손한 신사이기도 했었다.
결코 어디에서도, 그는 잘난 척 고개를 치켜드는 일이 없었다.
아니 그의 음악에선, 그런 것들이 느껴진다.
헌데 그의 음악인생에서, 故 클라라 하스킬과의 파트너십은 대단한 것이었었다.
故 클라라는, 피아니스트이지만 동시에 바이올린 연주도 아주 능한 연주가였었다.
때문에, 둘은 서로 악기를 바꾸어서 연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故 클라라는 故 그뤼미오와의 연주여행
중 기차역의 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
진 사고로, 그만 사망하고 말았었다고 한다.
그 사고로 故 그뤼미오는, 한동안 연주를 전혀 하
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이올린 교수로서의 故 그뤼미오는, 그의 제자들에게 고도의 테
크닉을 요구하면서도 더욱 강조했었던 것은, 플레이즈와 소리의
질에 절대적인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즉 그의 지도는, 틀에 박힌 롤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각 개개의
학생들이 지니고 있는 개성을 파악해 학생 스스로가 그것
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방식을 택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6年 故 그뤼미오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었다.
그의 나인, 65세밖에 안된 한창의 나이였었다 한다.
헌데 벨기에 정부는, 그에게 남작의 작위를 주었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