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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긍수 - 초혼(招魂)

한국 가곡

by tl3659\0\0 2018. 2. 12.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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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긍수 - 초혼(招魂)

작시 : 故 김소월 · 작곡 : 임긍수

노래 : 김영선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虛空) 중에 헤여진 이름이여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사람이어!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멀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사람이어.

 

저녁하늘, 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서

나는, 그대 이름 부르노라.

 

시인, 故 김소월의 초혼

 

초혼(招魂)은 1,92512,김소월이 펴낸 시집인 ‘ 진달래꽃 ’ 에서 처음 발표된 시다.

초혼은, 임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을 담고 있다.

 

시의 갈래는 서정시 · 자유시이며, 민요적 · 전통적 · 격정적 · 애상적 성격을 가졌다.

7 · 5조의 3음보로 쓰였으며, 슬픔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헌데 이 시에서, 故 김소월이 표현하고 있는 죽은

대상이 누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故 김소월이, 설움에 겹도록 부르고 있는, 이 사랑하는 사람은 과연 그 누구일까?

시인이 애타게 부르고 있는, 그 이름의 주인공은 故 김소월이 사랑

했던 여성인 ‘ 오순 ’ 이라는 이름의 여인이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故 김소월과 ‘ 오순 ’ 이라는 여성은 과연 그 어떤 사이였었을까?

故 김소월은 십대 초반 때,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3살 위의 여자아이인 오순을 만났었다고 한다.

헌데 둘의 관계는, 친구 사이의 우정에서 이성간에 느끼게 되는 사랑으로 발전했었다 한다.

 

해서 둘은, 남산에 있는 냉천터 폭포수 아래서 몰래 만나기를 즐겨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평탄치가 않았었다 한다.

 

故 김소월을 키워준 조부가, 친구의 손녀인 ‘ 홍단

정혼을 약속해버렸기 때문이었었다고 한다.
해서 故 김소월은 14세가 되던 해, 조부가 정혼한 대로 맘 속에는 오순에게의

사랑을 간직한 채로 홍단실과 혼인을 했었다 한다.


해서 故 김소월과 오순은 서로 사랑하지만, 결코 나서는 안될 사이가 되고 말았었다 한다.
그리고 오순은, 故 김소월이 19세가 되던 무렵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었다 한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은 불행했었었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의처증이 심했고, 그로 인해 오순은 남

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아야만 했었다 한다.
그리하여 故 김소월이 22세가 되던 해에, 그만 오순이 세상을 떠나버렸었다 한다.


헌데 그녀는, 대꼬챙이처럼 말라죽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것

김소월에 대한 상사의 아픔 때문이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 故 김소월은 ‘ 진달래꽃 ’ 에, 바로 이 ‘ 초혼 ’ 을 발표했었다.


하지만 故 김소월은, 33세가 되던 해 마약덩이를 삼키곤 자살해 버리고 말았었다.

 

 시인, 故 김소월의


그의 본관은 공주(公州)이며,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으로 평안북도 구성에서 출생했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김성도(金性燾)이며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었었.

헌데 1,904年 그가 2살 때 처가로 가던 그의 부친 김성도는, 정주군과 곽산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됐었.


해서 그 이후의 그는, 광산을 경영하던 조부의 손에서 컸었다.
해서 그가,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주어 큰 영향을
끼친

숙모였던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

그러면서 그는,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한 1,915年 오산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었던 김억을 만났었다.
그리고 그는,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年 동인지

‘ 창조 · 5호 ’ 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었다.


그리고 또 그는, 오산학교를 다니던 동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

25에는 생전의 유일한 시집인 ‘ 진달래꽃 ’ 을 발간했었다.
또한 그는
1,916, 오산학교 재학 시절 고향인 구성군 평지면의 홍단실과 결혼했었다.

3 · 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었다.
그리고 그는 1,923, 도쿄 상업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같은

9월에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곤 귀국했었다.

그리고 이 무렵의 그는,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돼 ‘ 영대 ’ 동인으로 활동했었다.

그러면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던 광산일을

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했었.


그리고 그는, 구성군 남시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

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었다.


해서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곤 술로 세

월을 보냈으며, 또한 친척들로부터도 천시를 당했었.

해서인지 그는 1,934 1224, 곽산에서 아

을 먹곤 음독자살한 시체로 발견됐었다.

헌데 그의 사후 43만인 1,977, 그의 시작(詩作) 노트가 발견

는데, 그 시작 노트에 시들 중에 스승 故 김억의

이미 발표된 것들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


그의 스승이었던 김억이, 제자의 시를 자

신의 시로 둔갑시켜 발표했던 거였었다.

1,981, 그에게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됐었으

, 서울 남산엔 그를 기리는 시비가 있다.

 

 

 

Sop, 김영선

 

 

 

 

시인, 故 김소월

 

Sop, 김영선

작곡가, 임긍수 · 김춘환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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