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변훈 - 명태 · ’83
옴니버스 정규 앨범, 한국 가곡집 골든 애창곡 2집의 수록곡
작시 : 故 양명문 · 작곡 : 故 변훈 · 노래 : 故 오현명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 춤추며 ·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 가난한 시인이
밤 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짝 짲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 ·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작시자, 故 양명문
작시자였던 故 양명문 시인(1,913 ~ 1,985)은, 1,913年 평양에서 태
어나 1,939年 첫 시집인 ‘ 화수원 ’ 을 발표하며 등단했었다.
그는 6 · 25를 당하여, 대구로 피난 내려와 오래된 찻집인 ‘ 녹향 ’ 엘 화가
故 이중섭 · 소설가 최정희 등과 드나들고 있었는데, 마침
미 8군 통역관으로 대구에 내려와 있던 故 변훈을
만나, 시 ‘ 명태 ’ 를 보여주게 됐었다.
작곡자, 故 변훈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연희전문 정치학과를 다녔던 故 변훈(1,926 ~ 2,00
0)은, 재학 시절 서울대 정종진 교수에게 작곡을 배우고, 바리톤 최
봉진 선생에겐 성악을 배우기도 해, 우리 가곡인 ‘ 금잔디
· 무서운 시간 ’ 을 작곡해,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는, 졸업 후 발발한 6 · 25 때 통역관으로 종군했었고, 대구와 제주도 피난 시
절엔 문학인들과 교류하면서 ‘ 명태 · 낙동강 · 떠나가는 배 ’ 등을 작곡했었다.
바리톤, 故 오현명
바리톤인 성악가였던 故 오현명(1,924 ~ 2,009)은, 일제
강점기에 중국 푸순(撫順)에서 태어났었다.
그는, 중학생이었던 때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처음 무대에 섰고, 작곡
가인 윤용하가 결성한 조선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기엔 징병을 당하여 일본까지 끌려갔다 광복을 맞이한
뒤인 1,948年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했으며, 그 해
엔 한국 최초의 오페라인 ‘ 라 트라비아타 ’ 에 출연했었다.
그리고 그는, 6 · 25전쟁이 발발하자 정훈 음악대에서 복무했었고, 정전 협
정이 체결된 1,953年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로 강단에 섰었다.
그 이후의 그는, 1,964年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를 거쳐 1,973年 한양대학교 음악대
학장을 지냈고, 1,984年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1,999年 목원대학교 음악대학
초빙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1,964年부터 1,982年까진 국립
오페라단 단장을 지냈고, 1,984年엔 종신단원이 됐었다.
게다가 그는, 중후한 저음으로 바리톤과 베이스를 넘나들며 60여 편의 오페라에 출연했었
고, 50여 편의 오페라를 직접 연출하기도 하는 등, 한국 오페라 발전에 기여했었다.
특히 외국 곡들을 선호하던 풍조 속에서도, 한국 가곡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으며, 1,960年代부턴 한국 가곡만으로 독창회를 열
어 ‘ 가곡의 전도사 ’ 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었다.
가곡, 명태
1,952年, 부산에서 故 오현명 님이 맨처음으로 이 ‘ 명태 ’ 를 불렀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곱고 · 부드러운 선율의 노래가 유행했던 터라, 이 명태는
그야말로 청중들에겐 생뚱맞고 · 격에도 맞지 않는 노래로 여겨
졌는지, 여기 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었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이 명태의 첫 무대는, 비웃음속에 실패로 끝나버렸었다고 한다.
헌데 그랬던 이 노래 ‘ 명태 ’ 가 빛을 보게 된 것은, 1,964年 서울 시민회관
에서 열린 대학생들을 위한 대음악회를 열었었는데, 그 곳에서의 뜨
거운 반응에 힘입어 폭팔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마침내 이
명태를 명곡의 반열에 올려놓게 됐었다고 한다.
즉, 종군기자이며 · 시인이었던 故 양명문 님의 시에, 작곡가
이며 · 외교관이였던 故 변훈 님이 곡을 만들어
탄생한 노래인, 바로 이 명태를 말이다.
작시자, 故 양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