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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12

타계한 위안부들

by tl3659\0\0 2017. 11. 2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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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순.jpg

중국 호북성에서 거주하시다 작고하신,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박차순 할머님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12

 

 

 


 

故 김임선 할머님

 

2,005 9 7, 일본군의 종군 강제 피해자인 故 김임선 할머님도 타계하셨었다.

 

故 김임선 할머님은, 1,922 5 21日에 경주 지름사 인근에서 출생하셨었다.

故 김임선 할머님은, 나물캐러 갔다가 조선인 · 일본인에게 동행 · 강제 연행

, 일본의 오사카 · 훗카이도에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으셨었다.

 

 

훈 할머님

 

2,001 215,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훈 할머님도 당뇨

절염으로 고통받던 중 향년 77세에 이국땅인 캄보디아에서 별세하셨었다.

한국명으론 이남이인 故 훈 할머님은, 1,924年 경남 마산 진동에서 출생하셨었다. 

 

故 훈 할머님은, 1,942열여섯 살 때 싱가포르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가

‘ 하나코 ’ 라고 불려지며, 그곳 싱가포로에서 한 달을 지낸 뒤

보디아의 프놈펜이라는 곳으로 옮겨졌었다고 한다.

 

그러다 故 훈 할머님이,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로 끌려온 지 4年이 된 1,945年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 해방이 된 후, 故 훈 할머님은 캄보디아에서 다다쿠마라는

사람 사이에 생긴 아이를 낳으셨었지만, 몇년 후 그 다다쿠마에게 버려져

결국 故 훈 할머님은 그 캄보디아에서 혼자가 되셨었다고 한다.

 

헌데 프놈펜에서 약재상을 하며, 현지 시장조사를 나갔던 한국 기업인 황기연 씨에게 발견돼,

1,997 6月 캄보디아의 신문 ‘ 프놈펜 포스트 ’ 에 故 훈 할머님의 얘기가 게재됐었다.

 

그리하여 故 훈 할머님은, 지난 1,99755年만에 한국에 영구 귀국하셨었으나, 노령

설은 한국 풍습에 적응하지 못해 1,998年 캄보디아로 다시 돌아가셨었다.

 

하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는 봄에, 다시 한국으돌아오겠다 ” 라고

훈 할머님은, 결국 한국으론 되돌아 오지 못한 채 이역

만리인 캄보디아에서 애끊는 생을 마감하셨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할머님들과 함께, 故 훈 할머님이 55年 만에 귀국해 혈육을 찾은, 자신

의 얘기가 실린 신문의 사진을 보고 있는 생전의 모습

 

 

故 이순교 할머님

 

2,005 313,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

자이신 이순교 할머님도 타계하셨었다.

 

이순교 할머님은, 1,92010 13日에 출생하셨었다.
그리고 故 이순교 할머님은, 관동 · 싱가폴 · 오시마로 조선인 인솔

자와 일본인에 의해 끌려가시어, 성노예 생활을 하셨었다.

 

 

故 송신도 할머님

 

2,0171216日 오후 2시에,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신도 할머님도

향년 95세에 도쿄 도내에서 노환으로 인해 서거하셨으며, 장례식은 ‘ 재일 조선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장 ’ 으로 비공개리에 진행됐었다 한다.

 

신도 할머님은, 1,922年 충남 논산에서 출생해 16살 때인 1,938중국의 중부

· 한구 · 악주 등의 위안소로 끌려가시어, 7年 동안 참혹한 고초를 겪으셨었다.

 

그러나 해방 후 갈 곳이 없으셨던 故 송신도 할머님은,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 남성과 만나 거주한 것으로 전해졌었다.

 

故 송신도 할머님은, 16살에 부모님이 강제로 결혼시킨 남자가 싫어 집을 나와 혼자 힘으로 살

고자 일을 구하던 중, 일본의 간교한 속임수에 속아 위안부의 길을 걷게 되셨었다 한다.

 

故 송신도 할머님은,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임신을 수차례 하셨었는데, 아이를 낳아

키울 수가 없어, 중국사람에게 키워달라고 맡길 수밖에 없으셨었다 한다.

 

故 송신도 할머님은, 어느 때는 7개월된 태아가 뱃 속에서 죽

, 태아를 혼자 손으로 끄집어 내셨었다고 한다.

, 죽은 태아를 처리하는 것도 · 산 아이를 낳는 것도

모두 위안부 혼자서 감당하셨었다고 한다.

 

그리고 故 송신도 할머님이, 일본의 패망 후 곧바로 조선으로 가지 않으시고 일본으로 가

유는, 부부의 연으로 같이 살자고 한 일본군인의 말을 들었었기 때문이셨다 한다.

 

해서 故 송신도 할머님은, 16살에 조선땅을 떠나 중국땅에서 이리 저리로

헤매시23살 쯤이 되어서야 겨우 일본으로 가게 되셨었다 한다.

 

비참한 마음에 故 송신도 할머님은, 달리는 기차에 몸을 내던져셨었다 한다.

그러시, 주위 분의 소개로 남은 생을 함께 하신 평생반려자,

재일 한국인 남편을 만나 함께 사시다 2,011年 동일

대지진를 겪으신 뒤 도쿄로 이주하셨었다 한다.

 

물론 그 남편은 앞서 돌아가셨었지만, 故 송신도 할머님은 그 남

을 위해 항상 꽃을 준비해 기도를 하셨었다 한다.

 

왜냐하면, 그 남편 분관 한평생 부부로 살면서도 단 한

번인들 성관계를 하진 않으셨었다고 한다.

 

故 송신도 할머님은, 위안부 생활로 몸을 망쳐버려, 사랑하는

사람관 결코 그러고 싶진 않으셨었다고 한다.

 

 

그리고 故 송신도 할머님은, 일본에 사는 한국인 피해자로는 유일하게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내셨었다.

 

1,993, 처음 소송을 제기해 2,003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가 확

되기까지 10年간 법정에서 맞서 싸우기도 하셨었다고 한다.

 

헌데 “ 비록 재판엔 졌지만, 마음은 지지 않아 ” 라고 외쳤었던, 송신도

머님의 10年에 걸친 재판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나의 마

, 지지 않았다 ’ , 지난 2,007年에 공개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또 故 송신도 할머님은, 2,016年 ‘ 100만 시민이 함께 하는 여

인권상 시상식 ’ 에서 1원을 받으시, 그대로 ‘ 일본군 성노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 재단 ’ 에 기부하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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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앞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시는, 故 지돌이 할머님의 생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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