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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13

타계한 위안부들

by tl3659\0\0 2018. 4. 15.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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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를 증언 中인 이옥선 할머님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13

 

 

 

 

 

안점순 할머님

 

2,0183 30,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안점순 할머님도 별세하셨었다.

안점순 할머님은, 폐암으로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치료를 받으시다가 건

상태가 악화돼, 향년 90세에 결국 운명을 달리하셨었다고 한다.

 

지난 1,928, 서울시 마포구 복사골(도화동)에서 태어나셨었던 故 안점순 할머님은,

머님이 14살이1,942年의 어느 날, 할머님의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 여

들은, 모두 동네 방앗간 앞으로 모여라 라는 방송을 듣곤 어머님과

나갔다가, 강제로 트럭에 실려 전쟁터로 끌려가셨었다고 한다.

 

그 이후 故 안점순 할머님은, 기차를 타곤 평양 · 중국의 베이징(북경) · 톈진(천진)을

모래만 보이는(중국의 내몽골로 추정) 어디론가로 려가시어, 전쟁터에

3年간이나 일본군의 강제 위안부 생활을 해야만 하셨었다고 한다.

 

리고 故 안점순 할머님은, 전쟁터가 이동될 때마다 끌려다녀셨었다 한다.

생전의 故 안점순 머님은, 그 때 “ 짐승보다도 못

한 취급을 받았다 ” 라고 증언하셨었다 한다.

 

그러다 광복을 맞은 1,945, 故 안점순 할머님은 18살이 되셨었다.

그러나 故 안점순 할머님은, 해방 직후의 8개월 동안은 중국의 베이징에서 지내셨었다 한다.

하지만 그 이듬해, 할머님은 톈진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돌아오셨었다 한다.

 

그리곤 할머님은, 서울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작정 걸으셨었다 한다.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잠을 자고, 밥을 얻어먹으면서 밤 · 낮으로 걷고 또 걸으셨었다 한다.

그리하여, 긴 시간을 떠돌다가 1,946年 고향(복사골)으로 돌아오셨었다 한다.

헌데, 마을 어귀에서 어머님과 극적으로 만나셨었다 한다.

 

 

그러나 가까스로 집에 돌아오신 할머님은, 석 달 동안을 앓으셨었다 한다.

어머님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자리에서 일어나신 故 안점순 할머님은 23살이던 1,9

50年의 한국전쟁 발발 후 어머님과 함께 미군 부대에서 빨래 일을 하시다가,

이후엔 대구로 내려가 친구가 하는 식당에서 함께 장사를 하셨었다 한다.

 

그러다 결혼하지 않은 채, 홀로 지내시던 故 안점순 할머님은 1,990

카(오빠의 아들)와 함께 수원으로 이사를 가셨었다 한다.

그리곤 1,9938, 막내 조카딸의 신고로 끔찍했던

‘ 위안부 ’ 의 기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었다.

 

그리고 평생 홀로 사시어 자식이 없었던 故 안점순 할머님은, 경기 수원

조카 내외들과 함께 살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썼으셨다.

 

2,01738日 오후(현지시간),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州) 레겐스부 
르크 인근 비젠트의 네팔 - 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에서 열린,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한 故 안점순 할머님의 생전 모습.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하점연 할머니 별세
 

하점연 할머님


2,018 10 26,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故 하점연

할머님(97)도 건강 악화로 숨을 거둬셨었다.


하점연 할머님은 15살 되던 1,936, 일본 오사카에 사는 언니네

들을 돌봐 주러 갔다가, 이웃 한국인 아주머니가 한국에 데려다

준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가 한 공장으로 끌려가셨었다.


그 이후의 하점연 할머님은, 그 공장을 거쳐 1,940대만의 팽호도 조선관과

난 섬의 명월관과 홍콩 · 중국 · 광둥 ·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난

위안소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겪으셨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故 하점연 할머니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러다 해방 이듬해인 1,946 4, 25살의 나이로 부산으로 귀국해

서울에서 지내다가 1,993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돼

2,016 5터 나눔의 집에서 거주를 하셨었다.


헌데 나눔의 집 관계자는, 하점연 할머님은 직접 낳진 않았

, 슬하에 22녀를 두셨다고 설명했었다.


 

[사진 광주 나눔의 집 제공]

 

故 김순옥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였던, 故 김순옥 할머님도 2,0

18125日 향년 97세에 노환으로 귀천하셨었다.

 

故 김순옥 할머님은 1,922,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셨었다.

故 김순옥 할머님의 집 앞에서 보면, 평양 모란봉이 내다보였었다.

 

故 김순옥 할머님에겐, 오빠 둘 · 여동생이 한 명 더 계셨었다.

그러나 故 김순옥 할머님의 어린 시절은, 콩으로 죽을 쒀 먹었을 만큼 생활이 궁핍하셨었다.

해서김순옥 할머님은, 7살 때부터 남의 집에서 식모 · 유모 등의 일을 해야만 하셨었다.

 

 

그러다 故 김순옥 할머님은, 20살 때 공장 취직을 미끼로 위안부를 모집한 일본군

속아, 중국 헤이룽장성 석문자 위안소에 끌려가 고초를 겪으셨었다.

해방 이후의 故 김순옥 할머님은, 생계를 위해 중국인과

혼인한 뒤 중국 둥닝에 정착해 생활하셨었다.

 

그러다 2,005年의 故 김순옥 할머님은, 여성부 · 한국정신대연구소 · 나눔의 집의

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후 나눔의 집에 입소해, 일본군의 성노예

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와 증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었다.

특히 2,013年에는, 일본 정부에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민사조정을 신청하셨었다.

 

이 밖에도, 소녀상에 말뚝 테러를 한 ‘ 스즈키 노부유끼 ’ 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비하한 일본 록밴드 ‘ 벚꽃 난무류 ’ 와 ‘ 제국의 위안부 ’ 의 저자인 ‘ 박유

· 세종대 교수 ’ 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등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셨었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포항의 박필근 할머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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