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를 증언 中인 이옥선 할머님
타계한, 일본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모음 13
故 안점순 할머님
2,018年 3月 30日,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故 안점순 할머님도 별세하셨었다.
故 안점순 할머님은, 폐암으로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치료를 받으시다가 건
강 상태가 악화돼, 향년 90세에 결국 운명을 달리하셨었다고 한다.
지난 1,928年, 서울시 마포구 복사골(도화동)에서 태어나셨었던 故 안점순 할머님은,
할머님이 14살이던 1,942年의 어느 날, 할머님의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 여자
들은, 모두 동네 방앗간 앞으로 모여라 ” 라는 방송을 듣곤 어머님과 함
께 나갔다가, 강제로 트럭에 실려 전쟁터로 끌려가셨었다고 한다.
그 이후 故 안점순 할머님은, 기차를 타곤 평양 · 중국의 베이징(북경) · 톈진(천진)을
거쳐 모래만 보이는(중국의 내몽골로 추정) 어디론가로 끌려가시어, 전쟁터에
서 3年간이나 일본군의 강제 위안부 생활을 해야만 하셨었다고 한다.
그리고 故 안점순 할머님은, 전쟁터가 이동될 때마다 끌려다녀셨었다 한다.
생전의 故 안점순 할머님은, 그 때 “ 짐승보다도 못
한 취급을 받았다 ” 라고 증언하셨었다 한다.
그러다 광복을 맞은 1,945年, 故 안점순 할머님은 18살이 되셨었다.
그러나 故 안점순 할머님은, 해방 직후의 8개월 동안은 중국의 베이징에서 지내셨었다 한다.
하지만 그 이듬해, 할머님은 톈진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돌아오셨었다 한다.
그리곤 할머님은, 서울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작정 걸으셨었다 한다.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잠을 자고, 밥을 얻어먹으면서 밤 · 낮으로 걷고 또 걸으셨었다 한다.
그리하여, 긴 시간을 떠돌다가 1,946年 고향(복사골)으로 돌아오셨었다 한다.
헌데, 마을 어귀에서 어머님과 극적으로 만나셨었다 한다.
그러나 가까스로 집에 돌아오신 할머님은, 석 달 동안을 앓으셨었다 한다.
어머님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자리에서 일어나신 故 안점순 할머님은 23살이던 1,9
50年의 한국전쟁 발발 후 어머님과 함께 미군 부대에서 빨래 일을 하시다가, 그
이후엔 대구로 내려가 친구가 하는 식당에서 함께 장사를 하셨었다 한다.
그러다 결혼하지 않은 채, 홀로 지내시던 故 안점순 할머님은 1,990年
께 조카(오빠의 아들)와 함께 수원으로 이사를 가셨었다 한다.
그리곤 1,993年 8月, 막내 조카딸의 신고로 끔찍했던
‘ 위안부 ’ 의 기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었다.
그리고 평생 홀로 사시어 자식이 없었던 故 안점순 할머님은, 경기 수원에
서 조카 내외들과 함께 살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썼으셨다.
2,017年 3月 8日 오후(현지시간),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州) 레겐스부
르크 인근 비젠트의 네팔 - 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에서 열린,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한 故 안점순 할머님의 생전 모습.
故 하점연 할머님
2,018年 10月 26日,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故 하점연
할머님(97)도 건강 악화로 숨을 거둬셨었다.
하점연 할머님은 15살 되던 1,936年 봄, 일본 오사카에 사는 언니네 아이
들을 돌봐 주러 갔다가, 이웃 한국인 아주머니가 한국에 데려다
준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가 한 공장으로 끌려가셨었다.
그 이후의 하점연 할머님은, 그 공장을 거쳐 1,940年 대만의 팽호도 조선관과
하이난 섬의 명월관과 홍콩 · 중국 · 광둥 ·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난
신 구락부 위안소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겪으셨었다.
그러다 해방 이듬해인 1,946年 4月, 25살의 나이로 부산으로 귀국해
서울에서 지내다가 1,993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돼
2,016年 5月부터 나눔의 집에서 거주를 하셨었다.
헌데 나눔의 집 관계자는, 하점연 할머님은 직접 낳진 않았
으나,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다고 설명했었다.
故 김순옥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였던, 故 김순옥 할머님도 2,0
18年 12月 5日 향년 97세에 노환으로 귀천하셨었다.
故 김순옥 할머님은 1,922年,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셨었다.
故 김순옥 할머님의 집 앞에서 보면, 평양 모란봉이 내다보였었다.
故 김순옥 할머님에겐, 오빠 둘 · 여동생이 한 명 더 계셨었다.
그러나 故 김순옥 할머님의 어린 시절은, 콩으로 죽을 쒀 먹었을 만큼 생활이 궁핍하셨었다.
해서 故 김순옥 할머님은, 7살 때부터 남의 집에서 식모 · 유모 등의 일을 해야만 하셨었다.
그러다 故 김순옥 할머님은, 20살 때 공장 취직을 미끼로 위안부를 모집한 일본군
에 속아, 중국 헤이룽장성 석문자 위안소에 끌려가 고초를 겪으셨었다.
해방 이후의 故 김순옥 할머님은, 생계를 위해 중국인과
혼인한 뒤 중국 둥닝에 정착해 생활하셨었다.
그러다 2,005年의 故 김순옥 할머님은, 여성부 · 한국정신대연구소 · 나눔의 집의 도
움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후 나눔의 집에 입소해, 일본군의 성노예 문
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와 증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었다.
특히 2,013年에는, 일본 정부에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민사조정을 신청하셨었다.
이 밖에도, 소녀상에 말뚝 테러를 한 ‘ 스즈키 노부유끼 ’ 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
을 비하한 일본 록밴드 ‘ 벚꽃 난무류 ’ 와 ‘ 제국의 위안부 ’ 의 저자인 ‘ 박유
하 · 세종대 교수 ’ 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등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