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들의 사무친 원한을 샀었던, 제국 일본의 제 1대 조선통감이었던 亡 이토 히로부미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사진들 1
일본군은, 1,880年 경부터 우리 나라에 불법으로 일본군을 주둔시켜 각가지
만행을 자행한 후 결국은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아, 무려 36年 간이
나 점령했었던 것도 모자라, 이젠 다시 독도를 자기
들의 영토라고 우기며 점령하려 한다.
亡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 1,841年 10月 14日 ~ 1,909年 10月 26日)
亡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든 후 대신들을 매수하여 을
사오적이라는 매국노들 집단을 형성시킨 뒤 식민지화의 일단
계로 외교권과 경찰권 · 군권을 빼앗아 버렸었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그 작업의 과정은, 거칠고도 야비하기 짝이 없어서
亡
이토오는 조선 민족의 증오가 한 몸에 찍힌 원수가 돼버렸었다.
물론 이미 조선의 국운은, 기울대로 기울어 을사보호 조약이라는 이
름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조선은, 왕조가 문을 닫고 망하는
카운트 다운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긴 했었다.
러 · 일 전쟁이 끝나고, 이젠 동아시아에선 거칠 것이라곤 없
었던 일본은, 한국 식민지화 정책에 착수했었다.
이 조선 접수의 흉계와 실행에 앞장 섰었던 자가, 바로 亡 이토 히로부미이다.
그는 통감이라는 감투를 쓰곤, 우찌다 료헤이라는 일본 낭인을 데리
고 와선 조정을 마구 뒤흔들어 대며 공작을 진행했었다.
亡 이토 히로부미의 본명은, 하야시 도시스케(林利助)이다.
그는 야마구치현(山口縣) 출생으로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하급
무사의 집안인 이토가(伊藤家)에 양자로 들어갔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 손주쿠[松下村塾]에서 수학,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에 참가했었다.
메이지(明治) 신정부 성립 후 정계에 투신하여, 외국 사무국 판사 등을 역임했었
고, 1,870年에는 화폐제도 · 은행제도 조사를 위해 미국에도 파견됐었다.
1,881年, 국회 개설 문제로 정부 내에 대립이 생기자 기성 세력들
을 몰아내곤 메이지 정권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었다.
1,885年에는 초대 내각 총리 대신이 됐으며, 1,888年 추밀원(樞密院)
의장에 취임해, 국회의 개설과 동시에 귀족원 의장이 됐었다.
러 · 일 전쟁 후인, 1,905年 조선에 통감부(統監部)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
으로 부임, 한국 병탄(倂呑)의 기초 공작을 수행했었다.
그는, 개성과 우리나라의 무덤들에서 고려청자를 대대적으로
도굴하여 일본으로 가져 가게도 했었다.
1,909年엔 통감을 사임하곤, 추밀원 원장이 돼 만주 시찰을 겸하여 러시
아 재무 대신인 코코프 체프와 회담차 중국 하얼빈에 도착했었
는데,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대한 독립단 소속의 안
중근(安重根)에게 총탄을 맞고 죽었다.
그는 현대 일본의 기초를 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며, 특히 독일 헌법
의 기초에 의해 만들어진 메이지 헌법의 초안 작성(1,889)과 양원
제(兩院制) 의회의 확립(1,890)에 크게 기여했었다.
亡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간, 영친왕과 함께 찍은 사진
선량한 양민을 단칼에 처형하는, 지구상에선 단 하나뿐인 일본군
독립 투사 또는 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일본도를 손질하는 일본군인들
독립군 · 독립 투사들을, 처형 장소로 옮기기 위해 트럭에 싣고 있다
일본군인들에 끌려가는, 독립군 의병장
일본군의 장칼에, 목이 떨어진 독립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