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의 일곱 째 아들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사진 오른쪽)이 1,907年 유학이란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가기 전의 모습과, 당시 조선 초대 총감인 亡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사진들 2
亡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고
또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인물이기도 하다.
해서 亡 이토 히로부미는는, 일본에서는 영웅이지만 대한민국
측에서는 최대의 원수로 볼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었다.
1,905年, 조선의 초대 통감부가 된 亡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왕실을 모욕했었고, 조선 지배 계획을 착실히 수행했었다.
이런 상황에, 故 안중근 의사가 나서서 그를 처단한 거였었다.
일본의 공작 亡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故 안중근 의사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응칠(應七)
황해도, 海州 출생
漢學을 수학했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했었다.
1,895年,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한테서 프랑스어를 배웠었다.
1,904年,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年 그 돈으로 三興학교(후에 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南浦의 敦義學校를 인수,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론 나라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年 沿海州로 망
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했었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 參謀中將) 겸 특파 독립대장
(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日軍과 격전을 벌
였었으나 실패,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 투사들이 발간하는
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
에게 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데 진력했었다.
1,909年,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 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했었다.
그 해 10月, 침략의 원흉인 亡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財務相 코코프 체프와 회담
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곤,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였었던
우덕순(禹德淳)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곤,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
하(柳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었다.
1,909年 10月 26日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亡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 만철이사(滿鐵理事) ·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에게 중상을 입히곤,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한테 체포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