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금수현 - 그네 · ’79
작시 : 故 김말봉 · 작곡 : 故 금수현
노래 : 엄정행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한 번 구르니, 나무 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가곡, 그네의 탄생
작곡가인 故 금수현은 1,943年, 부산의 동래교회
피아노 담당이었던 전혜금과 결혼했었다.
헌데 그의 장모는, 당시 부산에 문명(文
있던 소설가인 故 김말봉(金末峰)이었었다.
헌데 작곡가 사위를 총애했던 그 장모는, 어느 날 자작시(詩)를 사위
에게 전하고, 그 장모의 그런 사랑에 감격한 故 금수현은, 그
장모의 자작시에 심혈을 기울여 곡을 붙였었다 한다.
해서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이 ‘ 그네 ’ 라고 한다.
작시자, 故 김말봉
작시자인 故 김말봉과, 작곡가인 故 금수현은 장모와 사위의 관계였었다.
그러나 故 김말봉은, 장편소설인 ‘ 찔레꽃 ’ 외 많은 작품들
을 집필했었는데 1,962年에 영원히 귀천했었다.
그녀는 1,901年, 부산에서 출생해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3年간
수료한 뒤, 서울의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했었다.
그 뒤의 그녀는, 황해도 재령(載寧)의 명신학교(明信學校) 교원으로 근무하다
가 1,920年에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 경도(京
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를 졸업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1,927年, 귀국해 중외일보 기자로
취업한 후 전상범(全尙範)과 결혼했었다.
그녀는, 이 무렵까진 문학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진 않았으나, 기자로
서 쓴 탐방기나 수필이 주위의 호평을 받자 1,932年, 보옥(步玉)이라
는 필명으로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 망명녀(亡命女) ’ 라는
단편소설로 응모해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했었다.
그 뒤 그녀는, 광복 후 서울로 올라가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해 ‘ 카인의 시장
과 · 화려한 지옥 ’ 등을 발표하는 한편, 사회운동 즉 공창 폐지 운동(
公娼 廢止 運動)과 박애원(博愛院) 경영 등의 일을 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하와이 시찰 여행을 하고 온 뒤 6 · 25 남침 때는 부산
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문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1,952年,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 예술가 대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해 ‘ 태양의 권속 ·
파도에 부치는 노래 · 새를 보라 · 바람의 향연 · 푸른 날개 ·
옥합을 열고 · 찬란한 독배(毒盃) · 생명 · 길 · 사
슴 · 장미의 고향 ’ 등을 잇달아 발표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흥미 중심의 통속소설 즉 애욕의 갈등
속에서도, 건전하고 정의가 이기는 모랄을 지니
되, 재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 그런 신조를 가진 소설가였었다.
작곡가, 故 금수현
故 금수현(金守賢)은 1,919年, 김해군 대저면에서 정미업과 땅콩
재배 업을 하던 한 토호의 장남으로 태어났었다 한다.
헌데 그의 생모는, 그를 낳자마자 산고로 사망해 사흘이 넘
도록 그도 울음이 없어,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그가 기사회생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소질
이 있어, 개별 지도를 받아야만 했었다.
그 이후 그는, 부산 제 2상고(부산상고)와 일본 동경 음악대학 성악과를 나왔었다.
해서 그는 1,941年, 졸업 후 귀국해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갖었었다.
그리곤 그는, 초창기 부산 음악계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했었다.
그러면서 그는 동래여고 음악교사로 부임해, 자신이 각색 · 작곡 · 연출한 음악극
을 여러 차례 학생들에게 공연케하여 학교 내외에서 찬사를 받았었다.
그러다 해방이 되자 그는, 동래여고 교장 김하득이 경남여고로 옮기면서, 27세
에 불과했었던 젊은 그가 일약 경남여고의 교감으로 발탁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경남여고엔, 교사 18명 가운데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절반이었었다.
해서, 누가 “ 김선생! ” 하고 부르면, 한꺼번에 돌아보는 일이 생겼었다.
그러자 그는, 우리 한글 성씨도 개척한다는 뜻으로 ‘ 김을 금 ’ 으로 바
꾸곤, 교직원은 물론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부르도록 알렸었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그는 고친 성을 부르지 않고 그대로 김
씨라고 불렀다 해서, 혼을 내는 촌극도 벌어졌었다고 한다.
1,950年代는, 한글로 이름을 쓰는 예는 희귀한 일
이었고, 글쓰기 역시도 마찬가지였었다.
해서 故 금수현은, 그런 점에선 분명 앞서간 사람이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인, 금난새 · 금노상이란 순 우리말
이름도, 그가 직접 지어준 거였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또 그는 ‘ 노래하자 ’ 라는 운동을 이끌기도 하면서, 경남 도립극장 지배
인 · 경남여중 교장 · 통영고교 교장 등을 거치곤, 문교부 편수관이 됐었다.
또 그는, 한글 전용을 신념으로 밀고 나가면서 한글 이름의 개척
자가 되고, 음악용어 한글화에도 크게 이바지했었다.
한때 그는 국제신문 고문을 맡으면서 칼럼도 썼었고, 1,970年엔 ‘ 월간 음
악 ’ 을 창간해 음악 저널리즘 발전에도 활력을 불어넣었었다.
해서 그는, 작곡 · 음악운동 · 음악전문지 · 음악행정 등 실로 다양
한 분야에 걸쳐, 폭넓고도 뚜렷한 공적을 남겨 놓았었다.
비록 그는 부산을 떠난지는 오래지만, 그가 추천하여 역시 부산에
서 음악활동의 뿌리를 키운 세계적 작곡가인 故 윤이상과
더불어 영원한 ‘ 부산 음악인 ’ 으로 기억될 것이다.
마치, 새 봄의 아지랑이에 묻혀 우리의 귓가를 울리는
바로 이 ‘ 그네 ’ 의 다정한 멜로디처럼 … .
그의 저서로는, 표준음악 사전 · 학생극곡집과
수필집인 거리의 심리학 등이 있다.
그리고 가곡집으론, 그네 등이 있다.
하지만 그는 1,992年, 73세의 나이로 영원히 귀천했었다.
Ten, 박인수
소프라노, 박찬숙
소설가, 故 김말봉
운보 · 김기창 화백
故 김동진 - 가고파 (0) | 2018.01.28 |
---|---|
이수인 - 고향의 노래 (0) | 2018.01.24 |
故 김규환 - 님이 오시는지 (0) | 2018.01.21 |
故 김동진 - 목련화 (0) | 2018.01.19 |
故 김연준 - 청산에 살리라 (0) | 2018.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