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동진 - 목련화 · ’95
옴니버스 정규 앨범, 한국 가곡집 3의 수록곡
작사 : 조영식 · 작곡 : 故 김동진
노래 : 엄정행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희고 ·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길잡이 목련화는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처럼 순결하게, 그대처럼 강인하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라.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내일을 바라보면서, 하늘 보고 웃음 짓고
함께 피고 함께 지니, 인생의 귀감이로다
그대, 맑고 향긋한 향기 온누리 적시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처럼 우아하게, 그대처럼 향기롭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값있게 살아가리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값있게 살아가리라.
작곡가, 故 김동진
1,913年 평남 안주군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서양음악을 접했고,
평양 숭실중에 진학해 바이올린과 피아노 · 화성학 · 작곡을 공부했었다.
1,931年 그는, 숭실중 5학년 때 ‘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
로 시작하는 가곡인 ‘ 봄이 오면(작시, 김동환) ’ 을 작곡했었다.
그의 첫 노래는, 대학 입학 이전부터 널리 불려졌었다.
1,932年 그는, 숭실전문학교에 들어간 뒤 이듬 해 일제하 온 국민
의 가슴을 적셨던 ‘ 가고파(작시, 이은상) ’ 를 작곡했었다.
그리고 그는, 목련화 · 산유화 등을 작곡해, 한국 가곡 역사에 큰 획을 그었었다.
그는, 6 · 25 전쟁이 발발한 1,950年 12月 임진강을 건너 월남했었다.
그 이전의 그는, 평양 음악대학 교수로 · 평양 교향악단의 전신(前身)인 중
앙 교향 악단과 합창단을 창단해, 지휘자로 활발하게 활동했었다.
헌데 신분증이 없던 그가, 서울에 가까스로 도착했을 때 헌병의 검문을
받았지만, 자신이 ‘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 ’ 의 가곡 ‘ 가고파 ’ 의 작곡가라고 소개했었다 한다.
그런데 핏발이 서 있던 헌병도, 아무 말 없이 그를
통과시켜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즉 전쟁의 와중에서도, 국민 가곡 작곡가의 유명세는 그렇게 컸었다.
그 이후의 그는, 일본 니혼고등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1,939年 중국 만
주의 신경 교향악단에 입단해, 제 1 바이올린 연주자 겸 작곡가로 활동했었다.
6 · 25전쟁 때의 그는, 서울에 정착해 서라벌 예술대 · 경희대 교수를 지냈었다.
그리고 그는 1,969年엔, 경희대 개교 20주년 기념으로 ‘ 오 내 사랑, 목련화
야 … ’ 로 시작하는 ‘ 목련화 ’ 를 작곡해, 폭넓은 사랑을 받았었다.
이 밖에도 그는, 못잊어 · 산유화 · 내 마음 · 수선화 등의 주옥같은 명곡을 남겼었다.
또 그는, 영화음악부터 군가까지 폭넓은 분야에 족적을 남겼고, 1,952年엔 군가 표창상
· 1,966年엔 청룡영화제 영화음악상 · 1,973年엔 국민훈장 모란장 · 1,982年엔
대한민국 예술원상 · 2,000年엔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일생에 걸쳐 우리 음악 찾기에 노력해
판소리를 오선 악보에 기록했고, 1,950年代엔 국악과 양악
을 함께 연주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하기도 했었다.
해서 그는, 국악을 결합한 그의 활동은 ‘ 신창
악 운동 ’ 으로 결실을 보기도 했었다.
그의 유족으론, 아들 신영(사업) · 신원(경희대 교수)과 딸 신화 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