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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15

위안부 증언·사진

by tl3659\0\0 2017. 11. 2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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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님의 그림 - 젊은 날은 어디가고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15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정서운 할머님의 증언

 

저는, 경상남도 하동에서 부자집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지는, 저를 일본학문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일본 학교에 보내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정교사를 통해서 한자와 한글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또 창씨 개명도 끝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해 놋그릇을 공출하게 했는데, 저의

아버지는 그것도 하지 않고 밤에 남몰래 집에서 일하는 일군 몇을

데리곤 논을 깊이 파서, 그곳에 녹그릇을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들통이 나서, 아버지는 경찰서에 끌려가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매일 저는, 면회를 갔지만 면회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박 구장(현 이장)이 집으로 와선 제가 일본 방직

장에 가면 아버지는 석방될 수 있다고 했었습니다

제가 공장으로 가는 그 날, 곧바로 아버지는 석방될 거라는 거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지 않으면 저의 아버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협박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헌데 그때 제 나인, 우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악양면 면장딸도 갔는데, 그 면장은 주재소 소장으로부터 악양면에서

처녀 공출량을 할당받자, 주재소 소장의 따귀를 때리곤 사표를 냈었습니다

그 이유로, 면장 딸도 저와 함께 끌려가게 됐던 거죠

우리는, 한국사람과 일본사람들의 인솔 하에 부산까지 가, 그

에서 배를 타곤 일본의 시모노세키에 갔었습니다.

 

내려보니, 보초가 있는 큰 창고에 약 천명 정도 되는 처녀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곳에는, 그런 창고가 여러 개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곳이 공장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곳에서 길게 땋아내렸던 제 머릿칼을 짧게 짤렸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3번씩, 김으로 싼 주먹밥을 받았는데, 저는 아버지 생

각과 집을 떠나온 두려움에, 그 것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3일 정도가 지나자, 배가 너무 고파서 그 김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헌데, 그때 얼마나 김밥을 질리게 먹었던지 지금도 김밥은 물론 김도 보기 싫어합니다

그렇게 그 곳에서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15일 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우리를 번호대로 불렀습니다

그리곤 차례대로, 우리를 굉장히 큰 배에 태웠습니다

배에는, 수천 명의 여자들이 함께 탔습니다

우리가, 시모노세키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대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곤 광동으로 갔고, 태국 · 방콕 · 사이공 ·

폴을 경유하여, 인도네시아의 쟈카르타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곳에서, 뉴기니아 · 스마트라 · 마랑 등지로 배치됐었는,

시키기 전에 자카르타의 육군병원에 우리 모든 여성

들을 데고 가선, 자궁속에 뭔가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는지, 아래배가 너무나 고통스럽게 아팠습니다

그리고 아마 약 3일동안, 하혈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를 쉬고 다시 배를 타고 가는데, 저는 심한 통증

하혈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23명 정도의 여성들과 함께 마랑의 육군부대에 배속되어,

대가 이동하는 대로 따라 다니며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우리는 부대 안에서 살았으며, 식사도 군인들과 함께 한 식당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저하고 함께 갔던 면장 딸은, 뉴기니아로 배치돼 갔습니다

위안소는 대대마다 하나씩 있었고, 한 위안소에 여자가 20 ~ 30명씩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여럿이 한 방을 썼는데, 군인들이 올 때는 포장을 친 각방을 이용하였습니다

헌데, 하루 평균 5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50명 이상을 상대하다 보면, 지치고 · 기절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한 후 다시 군인들을 상대하게 했습니다.

 

래서 성기가 부르트고, 도저히 아파서 걸음도 걸을 수 없게

이상 군인들을 상대할 수 없게 되면 팔에다 주

주었는데, 알고 보니 마약주사였습니다

헌데, 그 주사를 맞으면 덜 아팠습니다.

 

· 일요일에는, 100명도 넘는 군인들을 아침 9시부터 상대해야 했기 때문

, 들은 시작하기 전부터 4 ~ 5대의 마약주사를 제게 맞혔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 양쪽 팔에는, 이렇게 흙덩이로 뭉

놓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지금도 피가 잘 통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잘 사용할 수도 없지요.

 

아니 그렇게까지 하면서, 일본군은 그 짓을 계속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0시 이후에는 장교들이 들어와, 그들은 술을 먹곤 폭력

르고 · 자기들 뜻대로 응하지 않는다고 칼까지 찔러,

온 몸에는 아직도 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지요.

 

그리고 한 장교가, 칼자루로 제 팔을 쳐서 뼈가 으스러져

팔의 뼈는, 제 뼈가 아닌 다른 뼈입니다

가슴에도, 아직 칼자국이 그대로 크게 남아 있고요

그리 담배불로 지져서, 제 아랫배 양쪽에도 큰 흉이 남아 있고요.

 

그렇게 지낸 지 한 1년 정도 지났을 때, 저는 사는 것보다

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죽을 결심을 했었지요

그래서, 말라리아 병에 걸리면 먹는 약인 ‘ 근결합 ’ 을 한 알 한 알 모았었지요.

 

그러다 40알이 모이자, 저는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었지요

그런데 천정이 기우뚱해지더니, 그 뒤로 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깨어났을 땐, 제 주변에는 제 동료들이 저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2일 동안을 누워, · · · 귀로 피를 쏟으면서 기절해 있었다고 합니다

아니 그렇게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진 않았습니다

그 때의 휴유증으로 인해, 전 지금도 소화제가 아니면 음식을 소화해낼 수가 없고요.

 

그 당시 전, 위안소에서 기꾸꼬(菊子)로 불렸었지요

거의 속옷은 입지도 않았으며, 먹는 것이라고는 알

랑미 밥에 콩나물 · 된장국 정도였습니다

군 위안소에선, 가끔 중국인이나 · 인도네시아 민간인을 불러

대 내 청소와 빨래 등을 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 곳에서, 남양군 총사령관 아베가까가 항복 직전에 폭격을 맞아 죽었으나,

산 낭떨어지에서 부딪혀 죽었다고 하는 소문을 퍼뜨린 것을 들었습니다.

 

그 즈음, 23명의 여성들 중 14명은 죽고 9명만 생존해 있었습니다

일본군인들은, 여성들이 병들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죽여버렸습니다.

 

헌데 어느 , 영국군인지 · 미군인지는 잘 몰랐지만 연합군이 우리를 인수했습니다

그것도, 패전이 임박하자 우리를 방공호에 가둬 아마도 몰살하려고 했었나 봅니다

헌데 일본군인 중에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인 군속에게 얘기해 연합군에 알렸었다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몰살을 막을 수가 있었고요.

 

그런데 저는, 또 이 서양놈들에게 당하는 게 아닌가 싶어 엄청 놀랐습니다

그러나 참 다행히도 연합군은, 자카르타로 우리를 데리고 가선 수용소같은

설에서 1년 동안 배를 기다리며, 더 이상 강간은 없이 지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배를 타곤 부산에 도착했었지요.

 

그런데곳에서, 호열자가 발생했다면서 우리를 한

동안 배 안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한 달이 지난 후, 연합군 인솔자가 제게 1,000원을 주면서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집에 도착해 보니, 마치 귀신이 나오는 흉가같았지요

이웃사람들 얘기로는, 아버지는 결국 석방되지 못한 채 옥사

하셨고, 어머니는 목매달아 자살하셨다고 했습니다

해서 전, 저도 모르게 혼자가 돼 있었던 거지요.

 

그리하여 반겨 주는 사람도, 붙잡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때, 저는 마약 중독자가 돼 있었습니다

해서 저는, 결심을 했었지요.

 

일본놈들에 의해 강제로 마약 중독자가 되었는데, 돈을

들여 마약을 사 먹을 돈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혼자, 두문불출하곤 마약을 끊었습니다

7개월이나, 걸렸습니다

그 때 얼마나 이를 악물었, 제 이와 잇몸은 모두 망가져 버리고 말았지요.

 

그리곤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일본군 ‘ 위안부 ’ 문제가, 신문에 날 때마다 저는 그것을 오려서 모았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와 · 국가가 그런 일 없다

강제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등의 망언들을 뉴스와 신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해서 저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신고를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제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제가 아

니라 일본 정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부끄러워 할 줄은커녕 범죄를 인정도 하지

고 있으며, 사죄도 · 배상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민간 모금을 해서, 우리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하더니, 우리

위로금을 반대하니까 이젠 쯔구나이(보상)를 지급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린 단지 돈을 받기 위해, 그렇게 아픈 과거 ·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떨리

꿈마다 나타나는, 그 악몽같은 과거를 얘기하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40年의 침묵을 깨트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본이 바른 역사 ·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범죄에 대한 정당한 사죄와, 법적 배상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배상을 받으면 받는 즉시 찢어버린다 할지라도 죄에

대한 정당한 · 합법적인 배상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제 명예도 · 제 동료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을 것

, 전쟁터에선 총알받이로 · 병에 걸려 희생당한 우리 동

들이 고이 잠들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순악 할머님

박옥련 할머님

故 정서운 할머님이, 진해 제일병원에 입원해 계셨을 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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