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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14

위안부 증언·사진

by tl3659\0\0 2017. 7. 10.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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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14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님 여섯 분의, 슬픈 광복절

 

 

 

일본 사죄 받을 때까지, 죽어도 안 죽을 겁니다

 

곽창렬 기자 · 조선일보

 

일본 우익이, 하루 빨리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이시다.

 

일본이, 조직적이고 · 폭력적인 위안부 동원의 증거를 내놓지 않는 상황에

, 이들은 일본의 과거 만행을 세상에 드러낸 증언자들이시다.

헌데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 살아 있는 증거 ’ 가 사라진다.

 

우리 대한민국은 1,945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됐지만, 그러나

전히 위안부 할머님들은 고통 속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해방 후 63年이라는 긴 세월 동안, 만여 분(추산)이셨던 위안

피해자 할머님들은 이제 쉰일곱 분으로 줄어들었다.

 

생존자 대부분은 80 ~ 90,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

해서 63주년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을 찾

아가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생전 마지막 소원을 들어 보았다.

곳에는, 여 분의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이 생활하고 계신다.

 

질문 순서

 

1. 나이(출생년도) · 고향
2. 위안소에 끌려가게 된 계기

3. 해방 후 삶

4. 한국 정착

5. 소원

 

 

 


	강일출 할머니

 

강일출 할머님

 

“ 첫째도 둘째도, 일본에 사죄받고 · 배상받는 게 소원 ”

 

1. 85세(1,928年生) · 경상북도 상주

2. 16살때, 집에 순사가 찾아와서 “ 보국대를 뽑는다 ” 라며 끌고 갔음.

그리곤 중국 선양을 거쳐, 창춘과 목단강 ‘ 위안소 ’ 에서 위안부 피해를 당했음.

전쟁이 끝나갈 무렵,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아 부대 밖으로 이송돼

불에 태워지려다, 조선 독립군들의 도움으로 구출됐음.

3. 6 · 25 전쟁 이후, 중국 인민 해방군의 간호사로 일하다 퇴직

후에는 중국 지린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음.

중국인과 결혼해, 중국 지린시에서 살았음.

4. 2,000年 영구 귀국한 후, 현재 나눔의 집에서 살고 계심. 

 5. 일본인(그는 ‘ 일본놈 ’ 이라고 말했다)들한테 사죄받고 · 보상받는 것.

 

“ 한국 사람 가운데 일부는, 위안부 할머니가 돈을 원해서 사죄를 요구하는 걸로 생각하는

같은, 우리는 후세를 위해서 배상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후세들이

다음에 우리처럼 안 당할려면, 배상을 받아내야 하는 거다. 그래야 후세

들이, 앞으로 우리와 같은 처지가 돼도 말할 수 있다. 우리 후

들이, 나처럼 안당하도록 해야 한다. 잘못도 없

는데, 왜 우리가 일본 사람들한테 당해야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배

상을 받아내야 한다.

 


	이옥선 할머니

 

이옥선 할머님

 

“ 배상 않고 버티는 일본, 내가 자결이라도 해야 하나?

 

1. 86세(1,927年生) · 대구

2. 공부를 허락하지 않는 가난이 싫었던 이 할머님은, 16살 때 이웃의 꼬임에

기생집에 팔려갔었다, 심부름을 나와 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던, 백주

낮에 영문도 모른 채 군용차에 실려 끌려갔음. 위안부 시절, 일본

군인이 휘두르는 손찌검에 터진 고막은 치료를 받지 못해

직도 잘 듣지를 못함. 그리고 지금도 할머님의

장딴지엔, 일본 군인이 내리꽂은 장도로

인해 움푹 들어간 상처가 있음.

3. 해방되고 나서 소련이 이 할머님을 잡아가려고 하자, 한국 사

람들의 도움을 받아 신의주를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옴.

4. 충북 보은군 속리산으로 들어가서, 절에서 살았음.

지금은, 속리산에 터를 잡고 살고 있음.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법원에 직접 가서 소송을 접수

하고 · 기자회견에도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음.

5. 일본으로부터, 배상과 사과를 받아내는 것.

 

“ 세계가 다 아는데, 일본이 위안부 착취를 안했다고 하니 기가 막히는 것 아니야? 나는,

16살에 위안부에 가서 19살에 돌아왔어. 일본인들이 끝까지 배상을 안한다,

어떻게 해야 해?놈들 앞에, 자결해야 하나. 도 일본이 배상하지

않고, 버티는 것을 생각하다 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나는

일본인들한테 항의하러 일본에도 수차례 가고 했는,

거기에 오는 일부 일본 여성들도 울고 가고

. 내 소원은, 오직 일본인들한테 돈 받

· 사죄받아내는 것밖에 없다.

 


	김순옥 할머니

 

김순옥 할머님

 

“ 故鄕 평양에 있는, 부모님 산소 한 번 가 봤으면

 

1. 91살(1,922年생) · 평양
2. 집안 형편이 어려워 7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다녔었고, 배고픈

생들을 돌보기 위해 아버지 권유로 기생으로 팔려갔었음.

다시 집에 돌아올 생각으로 억척스레 돈을 벌어 빚을 다 갚고 돌아왔었지만, 아버지

또 다시 그녀를 팔아 중국 헤이룽장성 ‘ 석문자 ’ 위안소로 가게 됐음.

5년 동안, 위안부로 피해를 봤음.

3. 차마 고향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위안소가 있었

던 중국 헤이룽장성 일대에 정착해 살았음.

중국에는, 4명과 아들 2 · 며느리 · 손자들이 살고 있음.

4. 2,00512月 영구 귀국했고, 현재 나눔의 집에서 살고 있음.

5. 고향인, 평양에 가보는 것.

 

“ 내 나이 90이 넘었잖아., 특별한 소원이 있겠나. 그래, 내 고향 평양은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갈 수 없잖아. 이 있,

. 고향에 가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힌 산소에도

. 또 중국에 사는, 자식들도 보고 싶어.런데, 더는

력이 없어서 중국에 가기가 쉽지 않아. 그래,

새끼들을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어.

 


	[Why] 해방후 10만명서 이젠 57명… 일본 사죄받을때까지 죽어도 안죽을겁니다

 

이옥선 할머님

 

“ 日, 우리가 죽길 바래 , 빨리 정부가 나서라 ”

 

1. 86세(1927) · 부산

2. 집이 가난해, 학교에 갈 수 없던 처지였었는데 1,940年 돈도 벌

· 부도 시켜 준다는 말에, 울산에 있는 여관에서 일했음.

그러던 중 1,942年 조선인 한 명과 일본인 한 명에 의해,

옌지로 끌려가 3년간 위안부로 피해를 봤음.

3. 해방 후엔, 조선인 남자와 결혼해 중국 팔도진(八道鎭)에 정착

었지만, 편이 전쟁으로 입대하는 바람에 헤어졌음.

해서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들 내 · 외와 함께 중국 옌지에서 살았음.

5. 박근혜 대통령 만나서,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하는 것.

 

“ 우리 정부가, 빨리 일본에 사죄하라고 재촉을 해 줬으면 좋겠다. 정부가 제대로 안하니,

할머니들이 대사관 앞에 가서 맨날 주먹질하고 있잖아. 박근대통령이, 나를 한 번

초대해 줬으면 좋겠다. 한 번 만나, 옆에 앉아얘기하고 싶다. 일본인들이,

돈이 없어서 우리한테 배상을 하는 거겠나. 그 돈 가지고 전쟁 준

비를 하는 거. 우리가 이제 모두 80 ~ 90살이 다 됐는,

본은 우리가 죽기를 바라는 거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일본에서는, 우리 할머니들이 죽기를 기다리는

, 우리가 다 죽기 전에 해결해야 한.

역사는 사라지는 게 아니다.

 


	[Why] 해방후 10만명서 이젠 57명… 일본 사죄받을때까지 죽어도 안죽을겁니다

 

故 박숙이 할머님

 

“ 일본에 다시 치욕 안 당하게, 학생들 공부 잘해라 ”

 

1. 90세(1,923) · 경상남도 남해

2. 16살에 남해 앞바다에, 사촌언니와 함께 바지락(조개)

를 잡으려 가던 중에 일본군이 와서 끌고 감.

먼저 나고야에 갔다가, 중국 만주와 상하이 등지로

보내져 7年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었음.

3. 해방 직후, 부산으로 들어와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었음.

4. 31살에, 부산에서 고향 남해로 돌아가 완전히 정착.

위안부 생활로 인해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자식 3명을 데려다 키웠음.

5. 우리나라가 학생들 공부 잘 시켜서, 이들이 대인

(大人)이 되고 · 충신(忠臣)이 되는 것.

 

“ 왜 자꾸 한국 사람이, 왜놈들에게 고개 숙이나? 일본에, 고개 숙일 이유가 없다. 힘이 있었으

, · 리가 이렇게 위안부가 안됐을 거 아니냐? 우리 청년들이 대인되고 · 충신

이 되,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을 것 아니냐? 또 우리나라가, 무기

(器)를 입했으좋겠다. 무기를 많이 도입해서, 남의 나

라에 지지 았으면 좋겠다. 옛날에, 우리는 무기가 없어

졌다. 우리나라에는 칼하고 활밖에 었는데,

본에는 대포도 있고 다 있었잖. 그래서

진 거다. 남의 람에,

숙이지 았으면 좋겠다.

 


	배춘희 할머니

 

배춘희 할머님

 

“ 평생 홀로 살아, 가족과 오순도순 살아보는 게 소원 ”

 

1. 90살(1,923年生) · 경상북도 성주

2. 19살 때, 친한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공장에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음.

하지만, 이는 위안부 모집이었음.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친구와 함께 자원했음.

만주 일대에서, 위안부 피해를 봤음.

3. 해방 후 곧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여러 곳을 전전하다

1,951年 일본으로 건너가 약 30년을 보냈음.

4. 1,981年 한국으로 귀국했고, 1,997年부터

현재까지 나눔의 집에서 살고 있음.

5. 부모 · 형제와, 오순도순 살아보는 것.

 

“ 나는, 나눔의 집에서 유일하게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獨身)자다. 애도 낳을 수 없어 평생

혼자 살았다. 저승 갈 때 가져갈 것도 없고, 원도 · 한도 없다.다른 소원은 없다

. 나는, 가족도 없고 · 친척도 없다. 4살 때 어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도 저 세상으로 가셨다. 래서 어렸을 때, 할머

손에서 자랐다. 고독하게 컸기 때문에, 부모하고 ·

제들 하고 같이 한 번 봤으면 하는 생각.

그거 하나만 소원이다. 다른 소원은 없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박숙이 할머님

 

 

박영일 남해군수가, 96주년 3.1절을 맞아 남해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박숙이

(94· 경남 남해읍)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을 위로하셨던 생전의 모습.

 

광복절을 앞둔 11일 오후 경기 광주 퇴촌면 나눔의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91세) 옆에 할머니가 21살때 중국에서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2016.8.12/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경기 광주 퇴촌면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 위안부 ’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님 옆,

님이 21살 때 중국에서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 News1 · 안은나 기자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며 활발한 증언 활동을 하고 있는, 강일출 할머

님이 故 김학순 할머님의 흉상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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