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 할머님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 사진들 14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님 여섯 분의, 슬픈 광복절
일본 사죄 받을 때까지, 죽어도 안 죽을 겁니다
곽창렬 기자 · 조선일보
일본 우익이, 하루 빨리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군의 종군 강제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이시다.
일본이, 조직적이고 · 폭력적인 위안부 동원의 증거를 내놓지 않는 상황에
서, 이들은 일본의 과거 만행을 세상에 드러낸 증언자들이시다.
헌데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 살아 있는 증거 ’ 가 사라진다.
우리 대한민국은 1,945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됐지만, 그러나 여
전히 위안부 할머님들은 고통 속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해방 후 63年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십만여 분(추산)이셨던 위안
부 피해자 할머님들은 이제 쉰일곱 분으로 줄어들었다.
생존자 대부분은 80 ~ 90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
해서 63주년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을 찾
아가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생전 마지막 소원을 들어 보았다.
그 곳에는, 십여 분의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이 생활하고 계신다.
질문 순서
1. 나이(출생년도) · 고향
2. 위안소에 끌려가게 된 계기
3. 해방 후 삶
4. 한국 정착
5. 소원
강일출 할머님
“ 첫째도 둘째도, 일본에 사죄받고 · 배상받는 게 소원 ”
1. 85세(1,928年生) · 경상북도 상주
2. 16살때, 집에 순사가 찾아와서 “ 보국대를 뽑는다 ” 라며 끌고 갔음.
그리곤 중국 선양을 거쳐, 창춘과 목단강 ‘ 위안소 ’ 에서 위안부 피해를 당했음.
전쟁이 끝나갈 무렵,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아 부대 밖으로 이송돼
불에 태워지려다, 조선 독립군들의 도움으로 구출됐음.
3. 6 · 25 전쟁 이후, 중국 인민 해방군의 간호사로 일하다 퇴직
후에는 중국 지린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음.
중국인과 결혼해, 중국 지린시에서 살았음.
4. 2,000年 영구 귀국한 후, 현재 나눔의 집에서 살고 계심.
5. 일본인(그는 ‘ 일본놈 ’ 이라고 말했다)들한테 사죄받고 · 보상받는 것.
“ 한국 사람 가운데 일부는, 위안부 할머니가 돈을 원해서 사죄를 요구하는 걸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후세를 위해서 배상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후세들이
다음에 우리처럼 안 당할려면, 배상을 받아내야 하는 거다. 그래야 후세
들이, 앞으로 우리와 같은 처지가 돼도 말할 수 있다. 우리 후
세들이, 나처럼 안당하도록 해야 한다. 잘못도 없
는데, 왜 우리가 일본 사람들한테 당해야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배
상을 받아내야 한다. ”
이옥선 할머님
“ 배상 않고 버티는 일본, 내가 자결이라도 해야 하나? ”
1. 86세(1,927年生) · 대구
2. 공부를 허락하지 않는 가난이 싫었던 이 할머님은, 16살 때 이웃의 꼬임에
기생집에 팔려갔었다, 심부름을 나와 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던, 백주 대
낮에 영문도 모른 채 군용차에 실려 끌려갔음. 위안부 시절, 일본
군인이 휘두르는 손찌검에 터진 고막은 치료를 받지 못해
아직도 잘 듣지를 못함. 그리고 지금도 할머님의
장딴지엔, 일본 군인이 내리꽂은 장도로
인해 움푹 들어간 상처가 있음.
3. 해방되고 나서 소련이 이 할머님을 잡아가려고 하자, 한국 사
람들의 도움을 받아 신의주를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옴.
4. 충북 보은군 속리산으로 들어가서, 절에서 살았음.
지금은, 속리산에 터를 잡고 살고 있음.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법원에 직접 가서 소송을 접수
하고 · 기자회견에도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음.
5. 일본으로부터, 배상과 사과를 받아내는 것.
“ 세계가 다 아는데, 일본이 위안부 착취를 안했다고 하니 기가 막히는 것 아니야? 나는,
16살에 위안부에 가서 19살에 돌아왔어. 일본인들이 끝까지 배상을 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해? 그 놈들 앞에, 자결해야 하나. 지금도 일본이 배상하지
않고, 버티는 것을 생각하다 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나는
일본인들한테 항의하러 일본에도 수차례 가고 했는데,
거기에 오는 일부 일본 여성들도 울고 가고 그
래. 내 소원은, 오직 일본인들한테 돈 받
고 · 사죄받아내는 것밖에 없다. ”
김순옥 할머님
“ 故鄕 평양에 있는, 부모님 산소 한 번 가 봤으면 … ”
1. 91살(1,922年생) · 평양
2. 집안 형편이 어려워 7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다녔었고, 배고픈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아버지 권유로 기생으로 팔려갔었음.
다시 집에 돌아올 생각으로 억척스레 돈을 벌어 빚을 다 갚고 돌아왔었지만, 아버지
가 또 다시 그녀를 팔아 중국 헤이룽장성 ‘ 석문자 ’ 위안소로 가게 됐음.
약 5년 동안, 위안부로 피해를 봤음.
3. 차마 고향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위안소가 있었
던 중국 헤이룽장성 일대에 정착해 살았음.
중국에는, 딸 4명과 아들 2명 · 며느리 · 손자들이 살고 있음.
4. 2,005年 12月 영구 귀국했고, 현재 나눔의 집에서 살고 있음.
5. 고향인, 평양에 가보는 것.
“ 내 나이 90이 넘었잖아. 뭐, 특별한 소원이 있겠나. 그래도, 내 고향 평양은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갈 수 없잖아. 돈이 있어야지, 허
허. 고향에 가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힌 산소에도 한 번 가 보고
싶어. 또 중국에 사는, 자식들도 보고 싶어. 그런데, 더는 기
력이 없어서 중국에 가기가 쉽지 않아. 그래도, 내
새끼들을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어. ”
이옥선 할머님
“ 日, 우리가 죽길 바래 … , 빨리 정부가 나서라 ”
1. 86세(1927年生) · 부산
2. 집이 가난해, 학교에 갈 수 없던 처지였었는데 1,940年 돈도 벌고
· 공부도 시켜 준다는 말에, 울산에 있는 여관에서 일했음.
그러던 중 1,942年 조선인 한 명과 일본인 한 명에 의해, 중
국 옌지로 끌려가 3년간 위안부로 피해를 봤음.
3. 해방 후엔, 조선인 남자와 결혼해 중국 팔도진(八道鎭)에 정착했
었지만, 남편이 전쟁으로 입대하는 바람에 헤어졌음.
해서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들 내 · 외와 함께 중국 옌지에서 살았음.
5. 박근혜 대통령 만나서,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하는 것.
“ 우리 정부가, 빨리 일본에 사죄하라고 재촉을 해 줬으면 좋겠다. 정부가 제대로 안하니까,
할머니들이 대사관 앞에 가서 맨날 주먹질하고 있잖아. 박근혜 대통령이, 나를 한 번
초대해 줬으면 좋겠다. 한 번 만나, 옆에 앉아서 얘기하고 싶다. 일본인들이,
돈이 없어서 우리한테 배상을 안하는 거겠나. 그 돈 가지고 전쟁 준
비를 하는 거다. 우리가 이제 모두 80 ~ 90살이 다 됐는데, 일
본은 우리가 죽기를 바라는 거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일본에서는, 우리 할머니들이 죽기를 기다리는
데, 우리가 다 죽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역사는 사라지는 게 아니다. ”
故 박숙이 할머님
“ 일본에 다시 치욕 안 당하게, 학생들 공부 잘해라 ”
1. 90세(1,923年生) · 경상남도 남해
2. 16살에 남해 앞바다에, 사촌언니와 함께 바지락(조개)
를 잡으려 가던 중에 일본군이 와서 끌고 감.
먼저 나고야에 갔다가, 중국 만주와 상하이 등지로
보내져 7年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었음.
3. 해방 직후, 부산으로 들어와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었음.
4. 31살에, 부산에서 고향 남해로 돌아가 완전히 정착.
위안부 생활로 인해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자식 3명을 데려다 키웠음.
5. 우리나라가 학생들 공부 잘 시켜서, 이들이 대인
(大人)이 되고 · 충신(忠臣)이 되는 것.
“ 왜 자꾸 한국 사람이, 왜놈들에게 고개 숙이나? 일본에, 고개 숙일 이유가 없다. 힘이 있었으
면, 내가 · 우리가 이렇게 위안부가 안됐을 거 아니냐? 우리 청년들이 대인되고 · 충신
이 되면,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 아니냐? 또 우리나라가, 무기
(武器)를 많이 도입했으면 좋겠다. 무기를 많이 도입해서, 남의 나
라에 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옛날에, 우리는 무기가 없어서
졌다. 우리나라에는 칼하고 활밖에 없었는데, 일
본에는 대포도 있고 다 있었잖아. 그래서
진 거다. 남의 나라 사람에, 고개
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
배춘희 할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