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731 부대 때의, 생체 실험 사진들 2

일본 · 731 부대

by tl3659\0\0 2017. 6. 19. 20:18

본문

관동군 731 부대의 중장, 이시이 시로

 

731 부대 때의, 생체 생체 실험 사진들 2

 

 

 

731 부대의 중장, 亡 이시이 시로

  

그는, 10,0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자행한 731 부대의 부대장이었었다.

당시 그의 계급은, 구 일본군 군의(軍醫) 중장이었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치바 현에서 태어나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생물학 박사

, 대학총장 딸과 결혼한 후 일본군 장학금으로 유럽에서 생물학을 연구했었다.

 

또한 그는뇌막염이 발생했을 때 효과적인 수막(Water

Filter)을 개발함으로써 명성을 얻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그는, 1,931年 일본이 중 · 일 전쟁으로 만주를 얻었을 땐 군의과대학 박테리아학 

소장으로 올라 1,9328月에는 ‘ 광동군의 전염병 및 수질정화국 ’ 을 세웠었다.

 

는 또, 규슈대학 의학부에서 미군 포로에 대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아이카와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사건은, 큐슈대 의학부 인체해부 사건에

자그마치 실험을 명령한 해군 장교들이, 산 채로 해부된 미군 병사

의 간을 먹었다는 혐의로 기소되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학교와 관련해 故 윤동주 시인의 사망이 일어났다는 설이 있다.

故 윤동주 시인이, 피 대용으로 바닷물을 주입시키는 대체실험을 당했었다는 것이다.

1,921年의 그는, 육군병원과 육군 군의학교에서 군의로 근무하다, 대학원 과정으로

교토제국대학에 복학해, 세균학 · 위생학 · 병리학을 연구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1,989年의 이곳 터에서는, 100여 구나 되는 정체불명의 인골 더미가 발견됐었

, 그 상당수에는 드릴 · 톱 등의 흔적이 남아 있는 상태였었다고 한다.

헌데 亡 이시이는, 나중에 이곳에서 교관으로도 근무했었다고 한다.

 

일본 측의 해명으론, 전시 사상자의 부상 상태 연구를 위해 메이지 시대부터 수집한 견

본들이라고 했었는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미묘한 점들이 많아서 일본 국

내에서도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았었다고 한다.

 

실제로, 구미 각국에서도 유명인이나 여러 식민지 인종의 유골 견본을

보관하는 경우도 많아서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그의 성격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권력욕 · 명예욕에 가득 찬 인간상이었었다고 한다.

군에 입신한 후에도 그는, 군의관 계급이 중장까지로 제한된 것에 자주 불만을 터뜨렸었다고 한다.

해서 그는, 부대 예산을 착복해 궁궐같은 대저택을 짓기도 했었다고 한다.

 

헌데 그는, 그냥 볼 수 있는 부정에 찌든 군인의 모습이지만, 나쁜 놈은 더 나쁜 놈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시이 시로가 나체로 기생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운행중인 비행기에

검열을 삭제시킨 인물로도 과장되게 그려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그는 1,9282간의 해외 유학 길에 올랐었, 거기서 1세계대전

화학무기 · 세균무기에 대해 엄청나게 연구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 덕택에 그는, 육군 대신인 아라키 사다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일본 군부 내에서 생물학전 및 화학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전문 연구소가 다수 수립됐었다고 한다.

 

헌데 731 부대의 亡 이시이 시로, 왜 무죄 판결을 받았을까 ? ?

 

마루타 생체실험을 자행한 731 부대 亡 이시이 시로는, 전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었다고 한다.

,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을까?

 

MBC에서 방영됐었던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 에서는, 마루타 실험을 자행했던 일본 731

부대 총 책임자였던 亡 이시이 시로의 무죄 선고 진실이 공개됐었다.

 

亡 이시이 시로가 있었731 부대는, 살아 있는 사람을 통해 동상실험을 하거나 대형 원심분리기에

사람을 매달아 고속으로 회젼시켜, 피가 나오는 과정을 관찰하는 원심분리 실험까지 했었다.

 

亡 이시이 시로는, 세균무기와 독가스탄을 만들어 총 1,600차례에 걸쳐 중국 일대에 살포했었다.

이에, 중국군과 민간인을 비롯해 57만 명의 피해자가 나왔었다.

 

해서 A급 전범인, 亡 이시이 시로의 사형 혹은 무기징역이 확실시 되고 있었

지만, 亡 이시이 시로는 예상을 뒤엎곤 무죄를 선고받았었다.

헌데 그를 살린 것은, 전범 재판 총 책임자였던 맥아더 장군이었었다.

맥아더 장군은, 미 정부 고위 관계자가 亡 이시이 시로를 구하라

명령을 내렸고, 그는 이를 수행했었다고 한다.

 

‘ 작전명 ; 이시이 시로 구하기 ’ 명령 이유는, 731 부대 연구자료 때문이었었다.

731 부대는, 장기간 다양한 생체 실험을 통해 수많은 자료를

구축했었고, 미국은 이를 손에 넣으려 했었다.

만약 731 부대 연구 자료만 얻는다면, 의학 발전과 이익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시이 시로는, 종전과 함께 731 부대 자료를 불태웠었지만, 그러

국은 그가 많은 자료들을 빼돌렸다는 사실도 알게 됐었다.

 

헌데 재판을 통해, 전범들이 줄줄이 사형선고를 받게 되자 亡 이시이 시로

결국,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미국에 협조했었다고 한다.

 

미국과 함께 승전국 자격을 갖고 있었던 소련과 중국은, 이시이 시로를 사형에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만, 상대적으로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에서, 亡 이시이 시로는 무죄 선고를 받곤 풀려났었다고 한다.

 

 

 

세균에 감염, 끔찍하게 손상된 얼굴

 

 

 

세균전 공격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접종하여, 세균전을 연구

페스트 · 콜레라 · 탄저 등, 전염병으로 약 4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됨.

 

 

방독 복장으로, 생체 실험을 하는 일본 731 부대 요원들

731 부대는, 세균탄을 실제 전투에서 사용해 많은 인명을 살상했었다고 한다.

 

 

생체 실험을 당하고 있는, 여성 피해자

 

 

· 발을 결박하곤, 마취 없이 손으로 장기를 꺼내는 모습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세균 실험으로 사망한 후, 부패되는 과정을 구경하는 왜인들의 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

731 부대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