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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사진들 7

일본군의 만행

by tl3659\0\0 2017. 6. 15.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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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亡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시킨, 故 안중근 의사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 체프 ’ 와의 회담을 위해, 만주 하얼빈 역에 도착한 ‘ 亡

히로부미 ’ 를 향해 故 안중근 의사의 권총이 불을 뿜었었다.

 

故 안 의사가 발사한, 7.62mm 구경 FN 브라우닝 M - 1,900 권총탄 7발 중

3발은 亡 이토에게 적중했고 나머지는 옆에 있던 수행비서와 하얼

주재 일본 총영사 · 만주철도 이사에게 맞았었다.

 

 

 

파일:Hirobumi Ito 2.jpg

청년 지사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

 

 

“ 까레야 우라! · 러시아어로 코리아 만세 ” 외친 故 안 의

, 저격 직후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됐었다.

 

총에 맞아 쓰러진 亡 이토는, 수행하던 의사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30분 만에 숨졌었다.

침략의 원흉인 亡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었.

 

 

故 안중근 의사는, 1,8799 2황해도 해주읍에서 고려 말 이름난 유학자 故 안유의

후손으로 아버지 故 안태훈과 어머니 故 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었.

 

그는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 태어났다 하여, 자를 응칠이라고 불렀었다고 한다.

 

그는, 일찍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지만 학문에 열중하기보다는 사냥과 말타기

· 활쏘기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주변에서는 따를 자가 없었다.

 

 

1,905일제에 의해 을사늑약과 1,907정미 7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

강탈과 군대를 해산당하는 식민지가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던 故 안 의사는, 침략의 원흉인 亡 이토 히로부미를

징하여 동양 평화와 민족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었다.

 

헌데 1,909가을, 그는 亡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 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합병한 뒤 중국의 지배하에 있는 만주까지

빼앗을 계획을 세우고,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으로 보내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 체프와 협상을 하려했던 참이었었다.

 

 

해서 故 안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사 사무실에서 정재

· 김성무 등과 함께 亡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할 계획을 세

운 뒤,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었다.

 

하얼빈에 도착한 그는, 교포였던 김성백의 집에 머무르면서 동지를 모으고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도착하는 시간과 환영행사 등에

정보를 수집, 암살을 결행했던 거였었다.

 

 

 

일제 검찰에 신병이 인도된 故 안 의사는, 이듬해인 1,910214

여순 관동 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었다.

 

사형이 선고되자 故 안 의사는, 의연히 미소를 지으며 “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 ” 라고 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일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 군인의 자격으로,

토를 처단했다 ” 며 국제법에 따라 재판을 해 줄 것

요구했지만,제는 이를 거부했었.

 

이에 대해 한국 외국어대학교 이장희(법학박사) 부총장은, 故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당한 피압박 민

족이 식민지 지배에 대항해 민족해방 전쟁을 수행한 것으로

봐야 한다 ” 고 국제법적 근거를 제시했었다.

 

부총장은, 또 “ 당시 일제와 대한제국 의병 간에는 국내 · 외에 걸쳐 광범위한 교

전이 계속되고 있었고, 의병장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는 교전자로 볼

수 있으므로 故 안 의사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 고 밝혔었.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했던가?

 

아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故 안 의사 어머니는, 故 안 의사의 두 동생을 여순으로

보내 “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 ” 라고 일렀었다고 한다.

 

 

옥중에서 故 안 의사는,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의병활동과 하얼빈 의거 그리고 여순에서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옥중생활을 기록한 자서전(안응칠 역사)을 저술했었다.

 

또한 자서전을 낸 그는, 동양 평화론을 쓰기 시작했었다.

안중근 의사의 대표 사상인 동양 평화론은, · · 일이 각기 자주 독립국

으로 힘을 합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아내자는 정신으로 요약될 수 있.

 

안 의사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염려하여, 히라이시 고등법원장

동양 평화론이 완성될 때까지 사형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해 허락

받았지만, 일본은 불과 10여 일 후인 1,9103 26

10교수형을 집행, 32세의 나이로 순국했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안 의사는, 국내 · 외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었.

 

“ 내가, 한국의 독립을 되찾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3年 동안 해외에서 모진 고

행을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이천만

형제 · 자매는 각각 스스로 노력하여 학문에 힘쓰고 농업 · 공업 ·

업 등 실업을 일으켜, 나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의 자유 독립

되찾으면, 죽는 자 남은 한이 없겠노라 ” 라고.

 

해서 故 안중근이 쏜 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라 일본의 군국주의였고, 이를 전

세계에 고발함으로써 동양의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 그의 대의였다.

 

하지만 그가 서거하고 105여 年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대한민국은

전히 분단국가이며, 동양 3운명공동체는 소원하기만 하다.

 

안중근 의사한테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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